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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온화한 공기가 방 안을 채웁니다

b-garden 2025. 3. 17. 20:30

창문을 살짝 열어 두었더니 바람이 조용히 스며들었습니다. 겨울의 찬 기운은 이미 멀어졌고, 부드럽고 온화한 공기가 방 안을 채웁니다. 커튼이 가볍게 일렁이며 볕이 드리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보냈던 봄날이 떠올랐습니다.

할머니 댁의 마당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요. 겨울이면 장작더미 옆에 쌓인 눈이 천천히 녹아가고, 여름이면 장독대 주위로 푸릇한 풀들이 자라났습니다. 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때는 단연 봄이었습니다. 봄이면 매화가 하얗게 피어나고,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마당을 포근하게 덮었습니다.

어느 해 봄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날따라 바람이 참 따스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마당 한쪽 평상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저를 부르셨지요. "햇살이 좋으니 이리 와서 좀 쉬어라." 작은 손으로 평상의 나무를 톡톡 두드리던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할머니 곁에 앉아 따뜻한 대추차 한 잔을 받았습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면, 꼭 손을 감싸 안아 주는 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할머니는 늘 말씀이 많지 않으셨지만, 그 조용한 순간이 주는 편안함이 참 좋았어요.

"봄볕이 참 좋구나. 이렇게 따뜻할 때는 괜히 졸음이 오지."

할머니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 말이 단순한 날씨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한마디 안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뜻한 날, 평온한 순간을 마음껏 누릴 줄 아는 여유. 그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소중한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제 곁에도 따뜻한 차 한 잔이 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때와 다르지만, 봄볕이 내리쬐는 오후의 평온함만큼은 변함없네요. 문득, 할머니가 제 옆에 앉아 계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릴 적처럼 조용히 차를 마시며 봄볕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도 지금 어디선가 따뜻한 햇살을 맞고 계실까요? 혹은 창밖을 내다볼 여유도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잠시, 아주 잠시만이라도 창을 열어 보세요. 그리고 봄볕이 머무는 곳에 앉아 보세요. 따뜻한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그 순간을 음미해 보세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그저 있는 그대로 충분한 순간이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