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수려한

출간일: 2019.03.14

분량: 본편 4권

 

point 1 책갈피

"저... 형들 만나서 정말 좋아졌어요. 걸레라는 별명이 준 트라우마 때문에 목욕 시간이 오래 걸렸거든요. 근데 요즘은 목욕하는 데 10분밖에 안 걸려요. 악몽을 자주 꿨는데, 요즘은 잘 안 꾸고요."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문제지 볼 때마다, 글자가 흔들려서 수능 볼 엄두도 못 냈었는데, 이렇게 시험도 잘 봤어요. 다 형들 만나고 변한 거예요. 그리고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 두 분 다 제 은인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이런 솔직한 말이 서툰 윤원의 흰 얼굴에는 가득 홍조가 돌았다. 귓불은 이미 터질 듯 새빨개져 있었다.

point 2 줄거리

: 윤원은 오메가를 혐오한 어머니 탓에, 오메가로 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그런 윤원은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 지독한 학교폭력에 시달렸고, 그 트라우마의 여파로 수능을 망친 채 편의점 알바를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원의 어머니는 은퇴한 재벌 서승택과 재혼을 하고, 윤원은 서회장의 후계자인 장남 서정후와 천재 대학원생 차남 서건민과 한 집에 살게 된다.

승: 정후는 귀여운 동생 윤원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소극적이고 낯을 가리는 윤원을 살뜰히 챙긴다. 반면, 건민은 윤원을 박대하며,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후는 자신에게 서서히 곁을 주며 마음을 여는 윤원에게 보호자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건민 역시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윤원에게 생경한 욕구를 느낀다. 그러다 윤원의 히트에 두 형제가 동시에 휘말리면서, 윤원 쟁탈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전: 윤원에 대해 알아가면서, 두 형제는 윤원이 방임과 학교 폭력에 시달렸고, 그 어떤 치료도 받지 못해 심신이 망가져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재수 학원을 다니게 된 윤원은, 그곳에서 과거 자신을 괴롭히던 민규과 만나고, 재발한 트라우마로 몽유병을 앓는다. 민규가 주동자 태욱에게 윤원의 거취를 알리면서, 윤원의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정후는 윤원을 설득해 태욱과 패거리를 고소하고, 윤원은 학원을 그만둔다.

결: 윤원의 사정을 알게 된 승택은, 아내의 본성을 깨닫고 그녀와 이혼한다. 정후는 윤원을 위해 지금까지 쌓아 온 것들을 버리려 하고, 건민은 정후와 정후를 좋아하는 윤원을 보며, 윤원을 포기하려 한다. 하지만, 형들을 좋아한 윤원은 형들의 희생이 싫었고, 결국 도망친다. 정후와 건민은 서로에게 폭발하여 그간 쌓인 응어리를 풀어내고, 합의점(?)을 찾아 윤원을 데리고 온다. 세 사람은 평화로운 동거를 시작하고, 윤원은 우수한 성적을 받아 명문대생이 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상처 준 사람은 없고, 상처받은 사람만 있는 세상

'슬로우 데미지'의 기대치는 0였습니다. 1권을 시작한 저의 표정은 (=_=)였죠. 일단, 잉? 윤원? 표지 일러스트부터 도입부의 뻔한 전개, 평이한 서사... 관성에 의한 구매, 그 끝이 씁쓸했던 여러 케이스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니 형제들의 티카타카와 윤원의 꼼지락이 너무 귀여웠어요. 그리고, 비현실적 존잘님들이 신데렐라 간택하는 할리킹이 아니라, 너무나 인간적인 형제가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숨겨왔던 자아를 찾아가는 스토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물론, 소심하고 착하지만 자존감은 심해 바닥보다 낮게 깔려 있는, 상처수의 구원물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또 계속 읽다 보니, 그것만이 아니었구나 싶었습니다. 저의 표정은 (+~+) 변했어요. 이 소설 속에서 자낮수는 단순히 무한한 공의 사랑을 받아 밝아지는 것이 아니었고, 원래 잘난 공들은 진심 어린 애정, 단 하나만이 부족한 이들도 아니었습니다. 윤원은 자신의 오랜 상처를 해결해 준 정후를 스스로 떠나고, 정후와 건민은 인생에 미뤄둔 숙제를 끝내고 나서야 윤원을 얻을 수 있었죠. 참 잘 짜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슬로우 데미지'에서 가장 감탄한 부분은 인물 묘사였어요. 전형적인 듯 보이지만, 개성 있고 일관된 캐릭터가 잘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이소 작가님의 '개 같은 베이비'와 비교해 봤을 때, 정말 엄청난 변화로 느껴졌습니다. 오메가버스, 집 안의 차별, 재벌물, 구원물 이라는 유사한 클리셰임에도, '슬로우 데미지'가 훨씬 설득력 있고 흡입력 있는 작품이었어요.

세상에 상처받았다는 사람은 많지만, 상처 줬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상하죠?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으면 준 사람도 있을 텐데, 모두는 피해자이고 위로가 필요합니다. 몇몇 가해의 기억도 실수로 치부하거나 반성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요.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고, 세상엔 나보다 나쁜 사람도 많다고 믿으면서요. 불행의 원인을 나의 과오보다, 그저 권력도 돈도 없는 사회적 지위에서 찾고, 억울해 하기도 합니다.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객관적으로 보일 만도 하지만, 늘 그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 실상을 깨닫지 못해요. 그렇게 속세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나 봅니다.

윤원의 어머니는 피해자예요. 남자 오메가와 바람난 남편으로 인해, 졸지에 외벌이로 아들을 키워야 했죠. 아들을 짐짝처럼 여기고, 그 아들이 괴로움에 허덕이는 것을 무시하지만, 그래도 자식을 때리거나 버리는 사람보다는 낮다고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재벌을 만나 재혼하기까지 했으니, 윤원은 평생 갖지 못할 부를 자신 때문에 누려보는 거였어요. 그래서, 아들에게 부채가 없다고 여기는 어머니는, 아들의 끔찍한 학교폭력 사실을 알게 되었을때도, 그 아들을 위로하기보다는 남편에게 자신을 변호해 주길 바라죠.

정후와 건민의 아버지 역시 피해자입니다. 가족을 중요히 여기는 서승택은, 아내 없이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웠지만, 아들들은 자신에게 박대합니다. 첫째 아들은 회사 경영권을 승계 받은 이후에, 무능하지만 자신이 아꼈던 동생을 내치고, 자신과 다른 스타일로 경영을 하죠. 결혼은 하지도 않고, 결혼 전에 분가 불가의 명을 어기고 웬 남자와 정분이 나서 집을 나가겠다고 합니다. 둘째 아들은, 가족 모임은 고사하고, 말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왜 아들들이 어머니의 애정에 목말랐고, 그 관심을 독점하기 위해서 어떤 상처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정후와 건민 역시 피해자죠. 정후는 권리에 맞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일생을 살아요. 그러면서도, 모난 동생의 뒤처리를 도맡으며, 의젓한 장남의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관심은 하고 싶은 것 다하는 건민에게 향하고, 이렇게 노력해도 아버지는 늘 부족하다 여깁니다. 건민은 애당초 형에게 모든 걸 빼앗겼다고 생각합니다. 후계자의 지위, 어머니의 관심, 그리고 윤원의 사랑까지 말이에요. 그저 자신은 곁방에서 좋아하는 로봇만을, 조용히 만들며 살 뿐이라고요.

어째 죄인은 윤원 한 사람뿐인 듯 합니다. 또, 어머니를 이해하는 것도, 승택의 부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도, 애정을 받는 것에 감사하는 것도 윤원 혼자인 것 같아요. 윤원 인생 그 자체는 만신창이인데 말이죠. 윤원은 어머니에게도, 학교 폭력 가해자들에게도 사과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나름의 인과응보를 당하지만, 그 결과에서조차 그들은 억울한 피해자를 자처해요.

윤원은 오메가라는 사실을 숨긴 채, 부실한 영양 상태와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오랜 기간 억제제를 먹고 소취제를 뿌리며 살았어요. 그래서, 오메가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했고, 엉망인 몸은 폭탄처럼 히트를 터트립니다. 거기에 휘말려, 알파인 형들과 잠자리를 하게 되죠. 형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정하고 상량했지만, 정후는 맞선을 보러 다녔고 건민은 친절하지 않았어요. 윤원은 우유부단하게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면서도, 정착할 근거를 찾지 못합니다.

윤원이 어머니의 요청을 자르고, 승택의 집을 나오며, 정후의 고백을 거절하는 결정을 하는 부분이 저에게는 피크 타임이었습니다. 자낮수가 자존감을 찾는다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윤원이 사라진 뒤 나머지 인물들이 어떻게 변할지가 궁금했거든요. 물론, 해피엔딩을 위해서, 예상 가능한 전개로 이어집니다. 어머니는 현실을 도피하며, 승택은 경영권 일부를 돌려받고, 정후는 영화사를 인수하죠. 더불어, 세 사람은 공존과 균형을 이룩합니다.

분명 '슬로우 데미지'는 할링킹입니다. 권선징악의 룰에 따라, 달달물로 끝나는 구원과 성장의 스토리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로우 데미지'라는 제목이, 천천히 끓는 물에 죽어가는 개구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뜨거운 물은 피해지 의식인지도 몰라요. 아픈 것은 감각이고, 아프게 한 것은 인식이니, 당연히 머리보다 촉각이 예민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 감각에만 취해 있으면 칼의 휘두르고도, 사회를 탓하는 망상가가 될지도 모릅니다. 비커를 뛰쳐나온 개구리에게 필요한 건, 비단 용기뿐만은 아닐 거예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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