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클로젯

출간일: 2020.01.29

분량: 본편 2권

 

point 1 책갈피

"폐하, 부디...... 자유로워지십시오."

따라서, 그에게 목숨과 맞바꾼 자유를 허하노니.

그 아무것에도 속박되지 않은 황제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사내의 죽음. 이전에는 내리지 못했던 명령을 지금이라면 할 수 있으리라. 견범우는 웃었다.

"... 설령 그 자유의 대가가 참혹할지라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제 더는 자신이 그를 지킬 수 없음을 비로소 깨달은 까닭이다.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

자신마저 죽고 나면 이제 이 세계에서 천자를 지킬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먼저 제 아들을 보호하려던 선황은 수명을 다해 죽었고, 부친 역시 이 세상에 없었으며, 그들로부터 황제를 지킬 의무를 자처한 견범우 또한 이제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으니.

진실이 항상 제 편이지 않은 것처럼 자유가 늘 달가운 것만은 아니리라. 적어도 사내에게는 그러했다. 얽매였던 자는 처음부터 그가 아닌 자신이었다. 평생을 눈앞의 사내에게 속박당했다.

단 한순간도 바란 적 없던 자유였다.

"... 저를 범이라 부를 수 있는 이는 예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유일한 다행은 그 소원만은 이루어지리라.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에게 다 주어 남은 것 하나 없는 이 껍데기를 불사를 이유로는 진정 충분하노라고.

"오직 당신뿐입니다. 건."

- 부디 내가 주는 자유가, 당신을 하루만 더 웃게 하기를.

사내는 웃었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 미소마저 온전히 눈앞에 선 남자의 것이었다.

point 2 줄거리

기: 금환국의 황제 린위 건(건)은 허수아비다. 선황 부부가 승하하고 형제들마저 죽어, 유일한 황손이라는 이유로 황제가 됐다. 성군이 되려고 했지만, 얼마 있지 않은 수족들이 끊겨 나가는 결과만 낳았다. 건은 이제 의지를 품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비웃는 대신들의 조롱을 그냥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금환국의 일인자는 태위 재상 견범우(범), 이인자는 대승상 호규송이 되었다.

승: 범은 선황의 심복인 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건과 함께 동문수학한 벗이다. 하지만, 선황과 아버지가 죽고, 범 역시 전장으로 떠났다. 강력한 군벌이 되어 돌아온 범은, 대장군에서 최고직 태위 재상까지 올랐다. 그리고, 황후를 아비를 유배 보내는데 앞장서며, 황제와 본격적으로 척을 진다. 한편, 대승상 호규송은 고립무원의 황제를 돕는 척하지만, 사실 인간이 황제를 혐오하고,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주술사 여인과 건을 합방시키기도 한다.

전: 실상 반요족 여인의 주술은 건의 진명을 알아내지 못하면서 실패하지만, 들이닥친 범이 '건'의 진명을 부르면서 주술이 성립된다. 황제는 범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고, 그런 건을 범은 개로서 훈육한다. 범은 건에게 구속구를 채우고, 배뇨를 금지하며, 구슬을 품고 회의에 나가게 하는 등 치욕을 준다. 반면, 대외적으로 범은 건을 위엄 있는 군주로 만든다. 그리고, 이런 황제의 변화에 위기감을 느낀 귀족들은, 황제를 위험에 빠뜨린다.

결: 범은 노예시장에서 봉변을 당할 뻔한 황제를 구하고, 귀족들의 목을 벤다. 한편, 건은 범에게 황후를 회임시켜달라고 부탁한다. 분노한 범은 건을 거칠게 다루지만, 결국 건의 명령에 따르기로 한다. 그때, 대규모 내란이 터지고, 범은 죽을 생각으로 전장에 나간다. 범의 실종 소식은 곧 궁에 들리고, 승상 호규송은 본심을 드러내 황제를 죽이려 한다. 그때, 범이 나타나 황제를 구하고 큰 부상을 입는다. 황제는 반요족, 범과 함께 금수의 나라를 다스린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풀린 긴장감을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무릎 탁 치는 소설

화려한 금빛 휘장에 쌓여 검은 목줄과 붉은 안대를 차고 절규하는 일러스트, 그리고 '애완 황제'라는 제목까지! 대략적 내용을 짐작했죠.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책을 열자마자 노예시장의 참극을 보며 다리가 풀린 황제가 나와요. 수라 같은 황궁에 고립된 나약한 황제와, 진짜 수라가 되어 황제를 조련할 권력자... 혹시 그럴까 했지만, 역시 그렇구나... 그렇게 다소 긴장감 없는 독서가 시작됐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와~ 소리가 나오더라고요. 너무 뻔하다고 생각했던 초반이, 사실은 복선들의 밭이었거든요. 하지만, 전 작가님이 준 의미심장한 힌트를 놓쳤습니다. 어찌 보면 초반에 이미 결말을 다 써놓으셨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는데 말이에요. 결말에 이르러서, 다시 뒤돌아 뒤적였습니다.

금환국에서 다섯 가지 인간이 있습니다. 비탄에 빠져 스스로의 삶을 저버린 자, 죄를 짓고도 벌을 받지 아니한 자, 탐욕으로 그릇된 생을 살던 자, 그 해악의 수준이 인간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힐 만큼 타락한 자, 그리고 우연찮게 길을 잃어 흘러들어온 자... 제대로 된 인간은 없어 보이죠. 하지만, 잘 읽어보면, 이건 태생에 의한 구별이 아닙니다. 금환국에 사는 이는, 이런 인간 밖에 될 수 없다. 누가? 어째서? 어떻게? 궁금증을 품고 계속 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이 다섯 가지 중, 스스로의 선택 없이 존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연찮게 길을 잃어 흘러 들어온 자'예요. 어쩌면, '애완 황제'는 이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바로 황제가 '흘러 들어온 자'였으니까요.

황제에게 아무도 세상을 알려주지 않았기에, 황제는 한 달에 한 번 있는 외부 시찰을 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예시장에 가죠. 하지만, 잔혹한 현장을 목격하고 휘청거리다 들키고, 건을 본 노예들은 '인간이다.' 외칩니다. 승상도 함께 있었지만 노예들의 시선은 건을 향했고, 승상의 눈빛에 떨던 이들이 건에겐 본능적으로 구원을 바라요. 모두 노예를 보며 마땅한 처우라고 말하지만, 오로지 건만이 그들을 동정의 눈길로 보죠.

돌아온 황제는 '흉몽'을 꿉니다. 난폭한 정사의 소용돌이 중에, 갑작스레 비난의 음성이 연이어 들려요. '제구실을 못하는 사내' '저주받은 황자' '비천한 자' '쫓아내야 할 천자'... 그러다, 갑자기 그 음성들은 건을 희롱하며 강간하려 들죠. 하지만, 순간 핏물이 튀어 오르고, 잘린 목이 나뒹굽니다. 그 후 아는 목소리 하나가 들립니다. '그토록 바라던 것이 아니냐' 하는... 그때 궁 밖에 범도 황제와 열락에 빠진 꿈을 꿔요. 소제목 '예지몽'의 내용입니다.

승상은 황제를 혐오합니다. 선황의 유지와 그의 충실한 심복인 견가의 의지로 황제가 된 건을 못마땅하게 여겨요. 하지만, 유일한 생존 황손이었고 후사 역시 없었기 때문에, 대체할 자가 없었죠. 그래서, 차선책으로 황제에게 주술의 걸어 진짜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해요. 하지만, 그 여인은 과거 승상에게 원한을 가진 반요족이었고,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결국, 승상의 노력은 범을 황제의 주술사로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죠.

범은 주술로 건을 개처럼 훈육합니다. 건은 범의 '애완 황제'가 돼요. 하지만, '애완 황제'라는 제목엔 좀 더 복잡한 내막이 깔려 있어요.

건의 시선으로는 눈치채기 어렵지만, 사실 금환국은 금수의 나라예요. 황제가 노예 시장에 갈 때마다 본, 아이 포대기를 업고 네 발로 기어 다니던 노예 여인이 떠오르죠. 죄를 지은 비천한 자, 노예들은 추잡하고 저들밖에 모르는 본질을 가진 '인간'이고, 토벌당해 멸족될 뻔한 반요족은 인간의 피를 타고난 반쪽 요괴예요. '다섯 가지 인간' 이야기는, 어쩌면 원주민인 금수들만이 비탄과 탐욕에 빠지고, 타락하고 죄를 져도 벌을 받지 않는 이들임을 의미하는지도요.

 

그러다, '선인'이 금환국에 흘러 들어옵니다. 건의 어머니이자 선황의 총애를 받은 연 귀비였죠. 선인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금수들을 감화시키는 향을 내는 인간이었어요. 하지만, 귀족들에게 그 '선인' 또한 인간의 천박한 본질을 벗어나지 못한, 뜨내기에 불과했어요. 금수들은 탐욕에 빠져 죄를 지을 운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인간을 부정하다 천시하죠.

결국, '애완 황제'는 황제가 범에게 농락당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금환국에서 황제라도 인간은 '애완동물' 이상이 될 수 없음을 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귀족들이 어여뻐 해 줄 때만 안전하고, 조금만 반하는 의지를 가져도 호된 대가를 치르는... 건은 이미 '애완 황제'였을지도요. 정말 개가 되려고 그러시냐는 범의 호통이, 단순히 두 사람의 정사만을 지칭하는 것 같진 않았거든요.

범은 주술로 황제가 호통도 치고, 단호한 결단도 내리게 만들죠. 또, 범은 황제를 위해, 반요족 일부를 살려줘요. 주술로 황제에게 오만 치욕을 안기면서도, 우발적으로 건이 자신과 같은 마음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바란 것에 대해서는 자괴감에 빠집니다. 범은 건의 '마음'은 통제하지 않아요. 범은 건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키고 싶은 걸 지키겠다 말하죠. 범이 지키고 싶은 것...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아무리 선황의 함구령이 있었다지만 건이 금수들의 실체나, 황후도 알고 있는 장인의 부정부패와 범의 숨은 노고를 전혀 몰랐다는 부분은, 좀 설득력이 떨어져 보였어요. 또, 16살 때부터 건에 대한 육욕에 시달려 왔다고는 하지만, 범이 이렇게까지 건을 괴롭힐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개연성도 좀 아쉬웠고요. 하지만, 분명한 건 '애완 황제'는 뽕빨물로만 치부하기엔 너무 아깝다는 거예요. 금수의 본능이 열락뿐만은 아니었으니까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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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문라이트북스

출간일: 2019.03.15

분량: 본편 2권 + 외전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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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1 책갈피

나는 꼭 오늘 밤을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내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까지 내내 안락하고 행복해서 태어나 가장 행복한 밤이었다고 느끼고 싶었다. 20년 뒤, 30년 뒤에도 꼭 오늘 밤처럼 따뜻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다정한 차현재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품으로 얼굴을 더 깊게 묻었다. 그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 위로 입을 맞췄다.

너와의 미래를 사랑한다. 감히 기대도 할 수 없고, 꿈도 꿀 수 없는 저 먼 미래를 사랑한다. 그 미래의 현재를 사랑한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 있는 모든 과거의 현재를 사랑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지금의 너.

현재의 현재.

우두커니 선 나의 감정들이 그의 품에서 다정히도 무너졌다. 너의 온기는 틀리지 않았다.

point 2 줄거리

기: 이연하는 OT 때 자신을 대신해 술을 마셔준 차현재에게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차현재는 빛, 이연하는 어둠, 연하는 어둠 속에서 현재를 바라만 봤다. 하지만, 제대 후 복학한 학교에서 다시 만난 차현재는, 그 각오를 허물어트렸다. 현재는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 연하의 시선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연하에게 이유를 묻자, 연하는 물건을 모두 떨어뜨릴 정도로 과하게 떨며, 연신 사과만 하다 도망쳐 버렸다.

승: 현재는 연하와 친하지 않았지만, OT에서 만난 예쁜 연하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하가 도망친 이후, 현재는 연하가 신경 쓰였고 지켜보기 시작한다. 연하는 시키면 다 한다고 '콜'이라 불리며, 커피 셔틀, 책 반납, 조별 과제 등 자잘 자잘 한 심부름을 도맡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날은 얼굴에 멍을 달고 나타나기도 했다. 현재는 연하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연하를 무시하는 동기들에게 쪽을 주며, 연하를 챙기기 시작한다.

전: 그러던 어느 날, 안진수가 연하를 희롱하고, 보다 못한 다른 동기가 말리면서 싸움이 벌어진다. 그때 연하는 갑자기 뛰쳐나가 창밖으로 투신하려하고, 현재는 급하게 연하를 잡는다. 연하는 공포에 떨며 아버지에게 용서를 빈다. 그제서야 현재는 연하의 상처와 불안의 원인이, 그의 아버지임을 알게 된다. 연하의 아버지는 연하를 폭행하고, 모욕하고, 갈취했다. 고립된 환경 속에서 오랜 학대에 시달린 연하는, 여러 정신이상 증세를 홀로 견디고 있었다.

결: 현재는 연하를 더 적극적으로 보호한다. 연하의 고독하고 검은 우주를, 현재라는 빛이 밝혀주고 있었다. 연하는 용기를 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심한 폭행을 당한 채 현재를 찾아간다. 그 후 연하의 아버지는 학교까지 찾아와 연하를 다시 폭행하고, 그의 동기들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수감된다. 그 후 아버지는 다른 수감자와 다투다 죽고, 연하는 비로소 아버지에게 벗어난다. 연하는 현재와 동거를 시작한다. 연하는 처음으로 설레는 미래를 떠올린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

저는 재탕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냥 뭐든 반복해서 보는 걸 좋아해요. 3년 내내 한 시즌 미드만 본다든지,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책은 20번, 좋아하는 영화는 10번 이상 봐요. 참고로 최다는 1작 100번입니다. 그래서, 발 빠르게 최신작을 섭렵하거나, 많은 작품을 보지는 못하죠. 장단이 있습니다. 저는 저의 상황과, 나이와, 경험이 바뀌어 같은 작품에서 다른 감상을 느낄 때, 보물찾기 한 것 같은 짜릿함이 느껴져요. 재발견의 묘미죠.

'우두커니 나의 우주는'도 그중 하나예요. '격정 멜로' 리뷰 때도 잠시 언급했지만, 저는 원래 클레어님 작품과 잘 안 맞았어요. 저는 강수를 좋아하는데, 클레어님의 수는 예쁘고 유약해요. 결정적으로... 그 수가 고구마 100만 개 먹은 것 같은 생각이 나 행동을 계속하죠. 그나마 나은 수가 '언제나 타인'의 '태이'나 '러브론'의 '유현'인데, 그들도 딱히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어요. 약간의 분열증, 망상증, 맹목적 복종, 흡사 사이비 종교 추종자 같다고 할까요.

그러다, '결정 멜로'를 보고 다시 클레어님의 작품을 복기해 봤습니다. 저는 성실한 연재 작가님들을 아주 높이 평가하거든요. 그러다 발견 한 작품이 '우두커니 나의 우주는'이었어요. 이 작품이 매력적인 이유는, 연하의 심리 묘사 때문이에요. 내용은 불쌍하지만 착하고 예쁜 수가 공에 의해 행복해지는 일방적 구원물로, 다소 뻔합니다.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 이것이 연하가 본 현재가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연하는 무중력, 무호흡, 무광의 우주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뿌리내릴 힘도 없고, 숨 쉴 수도 없으며, 한 줄기의 빛도 없는, 어둡고 추운 우주에 연하는 외롭게 부유하고 있어요. 족쇄에 묶여 자유를 빼앗긴 사람에겐 '해방'이라는 희망이 있지만, 연하의 고립은 탈출이 불가능하죠. 다만, 연하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별, 지구를 꿈꿀 뿐이에요.

잘라내야지, 포기해야지,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불구하고, 연하는 그곳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어요. 그때 그 찬란한 빛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연하는 겁이 났어요. 그래서 열심히 피해 다니죠. 연하의 아버지는 연하가 예쁜 얼굴로 몸을 팔고 다닌다는 망상을 떠벌리고 다녔고, 연하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적 있던 사람들이 보내는 혐오의 눈빛을 기억해요. 진실이든 아니든, 연하는 자신의 얼굴과 존재가 죄스러웠어요. 현재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았죠.

하지만, 연하는 너무 눈에 띄었어요. 늘 주눅 들어있었고, 부당한 대우에 익숙해 보였고, 무엇보다 자주 다쳤어요. 게다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피해하는 것까지 느껴지는데, 성격 급한 현재가 가만있을 리 없었죠. 그리고 현재는 연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도, 자신이 연하에게 과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됐다는 것도, 일찍 알아채요. 하지만, 연하는 목까지 올라온 말들을 꾹 눌러 담기만 하죠.

현재는 연하에게 막연히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지만, 굳이 헤집지는 않았어요. 연하는 늘 위태로워 보였으니까요. 그러다, 연하가 투신을 시도하고 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상처의 뿌리가 매우 깊다는 걸 알게 돼요. 그리고, 그런 연아를 더 소중히 감싸줘요. 현재는 연아를 먼 우주로부터 조금씩 끌어안아요. 그리고, 그럴수록 현재의 중력은 연하를 더 잡아당기고, 연하는 서서히 현재에게 정착하죠.

연하는 자신의 두려움이 아버지를 더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것도, 동기들의 무리한 부탁을 들어 줄수록 점점 심해진다는 것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연하에게 두려움을 이기거나 불편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죠. 그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라, 우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거든요. 연하는 현재에게 이상한 자신을 숨기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건 당연한 거였어요. 우주인은 지구인이 아니니까, 지구인에게는 이상해 보일 수밖에요.

하지만, 현재를 만나고 연하의 우주는 무너집니다. 연하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동기들에게 자신을 더 이상 '콜'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선언하죠. 현재에게 아프다고, 못하겠다고, 용서가 아니라 진심을 입 밖으로 끄집어 냅니다. 태아가 세상에 나와 첫 울음을 울 듯, 옹알이만 하던 아가가 첫 단어를 내뱉듯, 연하는 그렇게 지구인이 됩니다.

저는 현재라는 이름을 정말 잘 지었다고 생각했어요. 과거의 현재는 연하에게 '이상'이었어요. 만질 수 없는 별이었고, 삼키면 안 되는 빛이었죠. 가질 수 없기에 체념해야 했지만, 바라보는 걸 멈추지 못했어요. 그래서 고통스러웠지만, 그랬기 때문에 현재에게 발견됩니다. 그리고 현재의 현재는, 연하에게 살아있는 사람이 돼요. 만지고, 대화하고,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는 실체! 연하는 미래의 현재를 그리며 비로소 우두커니 선 우주에서 지구를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다시 봐도 클레어님 작품은 분열증 환자의 일기 같은, 공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한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가 아예 '진짜 환자'인 '우두커니 선 우주'는 오히려 집중하기 쉬웠죠. 물론, 클레어님은 굉장히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비정상적 수가 바라보는 정상적 공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고, 이 강점이 새롭게 비춰질 시점이 저에게 찾아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탕은 무한히 필요하다는 자기 합리화를 해 봅니다.(끄덕)

※ 동일 작가의 다른 소설 리뷰

2021.03.27 - [BL 소설] - [현대물/할리킹/달달물] 격정멜로 - 클레어

 

[현대물/할리킹/달달물] 격정멜로 - 클레어

​ ​ ​ ​ ​ ​ point 1 책갈피 ​ ​ " 빛이 하연준 씨를 좋아하나 봐요. 예뻐서 자꾸 보고 싶은 거겠지, 내가 그런 것처럼." ​ "......" ​ "하연준 씨는 내가 알고, 또 내가 생각하던 모든 걸 다

b-garden.tistory.com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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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이색

출간일: 2017.10.30

분량: 본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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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1 책갈피

어느새 이스엘 프레이저가 내 거가 됐는지.

태자가 반응 없는 내 거를 슬쩍 쳐다보았다. 사타구니를 조물조물하자 불편한지 몸을 뒤튼다. 좋은 냄새가 났다. 숨을 들이마시자 식욕이 돋았다. 저녁은 걸렀고,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물 한 잔만 겨우 마셨다.

일단 벗겨놓고 한 판 하고, 침이나 좀 빨아먹고 늘어져서 자야지. 그러려면 분위기를 잡아야 하는데... 어디 보자. 내가 지금 멋있나? 뒷머리 눌린 건 아니겠지? 이럴 때면 집무실 한쪽을 죄다 거울로 만들고 싶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태자가 기사의 바지 안으로 쑥 손을 넣었다. 옷 안을 함부로 뒤적거리며 묻는다.

"오늘은 팬티 입었나?"

그 말에 기사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태자는 지분거리며 손가락을 놀렸다. 제 손에 흡수된 보습제의 바닐라 향이 이스엘의 성기에 옮을 때까지 주물럭댔다. 어쩔 줄 몰라 헤매면 그 뺨을 죽죽 빨고 옷을 홀랑 벗겨서 또 팬티를 뺏어갈 생각이었다.

point 2 줄거리

아델라이데 귀족 이야기: 순혈로 이어져 온 귀족가, 이스엘은 그 피를 지키기 위해 임신하는 약을 먹고 침대에 묶인 채 아버지에게 강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성교가 끝나면 아버지의 비서, 이스카란이 준 알약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스카란은 이스엘에게 아버지는 죽고, 자신이 가문의 주인이 되었음을 알린다. 사실, 이스카란이 이스엘에게 먹인 약은 '임신하는 약'이 아닌 '정조대'라는, 섹스파트너를 천천히 죽게 만드는 약이었다. 이스카란은 이스엘을 갖기위해 오랜 세월 더러운 일을 참으며 오늘을 기다린 것이다.

아델라이데 왕족 이야기: 능력은 출중하지만, 사교성이 떨어지는 태자 포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포사가 은밀히 마약 유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려 하자, 당연히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때, 제1기사단 부단장 세리언이 나서고, 조사는 시작된다. 세리언은 적을 만드는 포사의 태도를 고쳐주려 하지만, 곧 포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고립된 상황을 알게 된다. 세리언은 포사에게 마음이 쓰이고, 볼 때마다 몸이 달아오는 것을 느낀다. 한편, 왕의 명령으로 홀로 슬럼가에 간 포사는, 죽을 뻔한 위기에서 세리언에게 구출된다. 그 후, 베르나차의 여관에서 포사는 다른 의미로 세리언에 의해 죽을 뻔한다.

아델라이데 동맹 이야기: 재능과 충심을 겸비한 이스엘은 제국의 태자 피닉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스엘의 부모형제가 어마 무시한 부패를 저지르다 처형당하고, 이스엘은 피닉에게 경멸 받는다. 하지만, 이스엘의 능력을 인정한 황제는 그를 태자의 호위로 임명한다. 그러다 이스엘은 피닉에 대한 연심을 우연히 들키고, 피닉은 이스엘을 역겨워하며 괴롭힌다. 모멸감을 주기 위해, 화풀이로, 때론 재미 때문에 이스엘을 불러 강간하고, 그 빈도도 점점 늘어갔다.

그러던 중 제국을 방문한, 동맹국 아델라이데의 2왕자가 이스엘을 달라고 하고, 피닉은 이스엘을 그의 밤 시중을 들라 한다. 하지만, 이스엘은 차마 2왕자의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법사 제레미를 찾아가 마음을 없애는 시술을 받는다. 한편, 이스엘의 실종으로 공황에 빠져있던 피닉은 이스엘이 돌아오자 반긴다. 하지만, 이스엘은 피닉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며 떠나겠다 말한다. 순간 이성이 끊긴 피닉은, 2왕자에게 빼앗은 '임신하는 약'을 이스엘에게 먹인다.

이스엘은 도망친다. 피닉은 샅샅이 뒤지지만 이스엘을 찾지 못하고, 그간 이스엘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고 있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이스엘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깨닫고 절실히 후회한다. 그때, 이스엘은 피닉의 아이를 임신해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이스엘을 숨겨주었던 엘리노어는 피닉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이스엘은 궁으로 들어온다. 피닉은 이스엘에게 기꺼이 발 닦개가 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변태력

제가 '세헤라자데'를 선택한 이유는 전적으로 '리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리뷰를 쓰고 있고, 다른 이웃님들 리뷰도 읽지만, 같은 책을 읽어도 감상은 다~ 다릅니다. 특히나, 공감을 많이 받은 리뷰들은 대게 <매주 좋음>과 <매우 나쁨>으로 나뉘기 쉽습니다. 극단의 감정일수록 공감도가 높으니까요. 또, <매우 좋음>안에도 공맘, 수어메, 클리셰 편식, 작가 팬심, 필력부심 등 꽂히는 요소도 다양하죠. 그래서, 이렇게 리뷰가 대동단결하는 것은! 참 대단한 일입니다.

그 공감의 요소는 다름 아닌 변태!!! 변태의, 변태에 의한, 변태를 위한, 변태적인 판타지!!! 공감 순위는 좀 낮지만, 정말 아래 리뷰들이 대부분의 리뷰를 요약해 놓은 것 같아요. 흥미롭지 않으십니까? 빻빻한 빨간 맛과 창의적 하드코어물이 영역을 늘려가는 이 시국에, 피폐물인데 개그물인 것도 기발한데, 이렇게 많은 독자가 '변태'를 외치는 작품이란,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어요.

'세헤라자데'의 변태력은 매우 높습니다. 귀족, 왕족, 동맹 편에서 공통적 등장하는 중요 소재는 '약'입니다. '정조대'와 '임신하는 약'! 섹스 상대방의 이성을 앗고 끝내 죽게 만드는 약인 주제에, 이름이 '정조대'예요. 이것만으로도 작가님의 변태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임신하는 약'... 작중 의원에 말대로 이 약의 개발자는 변태예요. 임신하자마자 가슴에서 모유가 나오고, 극심한 통증을 없애기 위해 주기적으로 애 아빠의 정액을 먹어야 하죠.

피닉이야... 언제나 이스엘이 입었던, 검은 팬티를 갖고 다니는데요... 이 팬티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지... 읽는 내내, 작가님의 상상력에 투텀즈업을 날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귀족 편의 이스카란이 감금을 좋아하는 집착 통제광이라면, 왕족 편의 세리언은 초하이 텐션의 절륜공이예요. 하지만, 피닉은 순수한 변태예요. 앞선 두 공이 지나치게 건강한 신체(?)가 문제라면, 피닉은 거기에 더해 수치를 모르는 성향과 호기심을 지니고 있죠. 그래서, 홀로 후회공과 발닦개공의 루트를 걷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수가 처한 상황 때문에 '피폐물'을 넣지 않을 수 없었지만, 피폐물을 잘 못 보시는 분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개그물에 훨씬 가까워요. 일단, 설정 자체가 현실과 백만리 쯤 떨어진 판타지여서, 마음 편히 변태력을 즐길 수 있습니다. 또, 3편의 수는 결국 공에게 종속되지만, 그전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됐어요. 귀족 편의 이스엘은 애매하지만, 분명히 포사나 이스엘은 사랑을 이룬 셈이니 공의 변태력만 좀 덜하다면 완벽한 해피엔딩인 셈이죠.

주의! 귀족 편의 '이스엘'과 동맹 편에 '이스엘'은 다른 사람입니다. 둘 모두 소극적이고 피학적인 수 이미지라, 다르다는 문구를 읽었음에도 저는 자꾸 오버랩되더라고요. 짧은 단편에 안에 같은 이름을 반복해 쓰신 걸 보니, 작가님이 '이스엘'이라는 이름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헝거게임도요. 그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주인공 이름을 그 영화에서 차용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네... 어떤 이름이든 좋습니다. 작가님의 다작을 기원합니다.(찡긋)

 

 

 

※ 동일 작가의 다른 소설 리뷰

 

2020.12.12 - [BL 소설] - [현대물/달달물] 올림피언 - 한여름

 

[현대물/달달물] 올림피언 - 한여름

출판사: B&M 출간일: 2018.05.04 분량: 본편 1권 ​ ​ ​ ​ ​ point 1 책갈피 ​ ​ "저야 올림픽에 나가는 것만도 감지덕지지만 선배는 다르잖아요. 선배는 세계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니까.... 혹시 1

b-garden.tistory.com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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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비하인드

출간일: 2019.01.04

분량: 본편 1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남자들의 성기가 입안과 배 속을 후비고 그들의 손이 재경의 유두며 성기를 장난감처럼 주무르는 동안, 재경의 눈동자는 열심히 굴러가며 방안을 훑었다. 거의 생존본능에 기인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 방에는 시계가 없었다. 시간제한도, 단서도 없었다. 그저 벽에 걸린 합성사진과 지독한 약품냄새가 전부였다. 재경은 그저 그를 범하는 이들 사이에 둘러싸여 죽을 것 같은 기분과 죽고 싶은 기분 사이에서 헤매었다. 동창들은 죄다 미쳐버린 것 같았고, 지금 그들이 재경을 범하고 있는 것은 이 방을 탈출하는 것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point 2 줄거리

 

 

기: 재경은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술을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4명의 동창들이 있었다. 두루두루 원만했던 송우진, 반장 이준환, 체대를 다닌다는 김태우와 정영호, 모두 별로 친하지 않았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밀실에 갇혀 있었다. 마지막으로 눈을 뜬 재경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 타이머와 방의 구조를 보고 방탈출 게임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힌트를 찾기 시작한다. 그때 재경은 자신의 주머니에 든 백신을 발견하고, 혼자 마신다.

 

승: 한편, 4명의 동창들은 본인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한 모습을 합성한 사진을 발견하고, 흥분한다. 그리고, 재경이 섹스 토이에 농락당하는 사진이 추가로 발견되자, 탈출을 명분으로 재경을 사진과 똑같은 모습으로 만든다. 재경은 격렬히 거부하지만 중과부적이었고, 그 고통의 시간이 끝나자 탈출구는 개방된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방이었다. 그곳은 더 노골적인 퇴폐의 장소였고, 이미 광기 어린 4명의 동창들은 앞다퉈 재경을 유린한다.

 

전: 두 번째 방의 미션이 끝나자 또다시 탈출구가 개방되고, 그들은 세 번째 방에 도착한다. 두 개의 방에서 미미했던 약품 냄새가 심하게 진동했다. 순간, 재경은 Poison이라는 표시, 자신만 먹은 백신을 떠올리고, 4명의 동창을 미치게 한 것이 이 냄새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그 약품에 강하게 노출된 4명은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고 재경은 강간한다. 그때 3번째 방의 탈출구가 열리며 들어온 누군가는 강간 당하고 있는 재경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다. 웃으며...

 

결: 그는 고등학교 학폭 피해자 김건우였다. 재경은 건우를 때리거나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집단 폭행 당하는 건우의 사진을, 지금의 건우처럼 찍은 적 있었다. 건우는 웃으며 자신의 사진을 찍는 재경을 보며 꼴렸고, 재경을 위해(?) 방탈출 게임을 계획한 것이었다. 건우는 강간 당하는 재경의 입에 키스하며 알약을 밀어 넣는다. 재경은 정신을 잃고, 건우의 집에서 깨어난다. 건우는 참아 온 욕구는 재경에게 무참히 푼다. 그리고, 그곳은 탈출이 불가능한 방이었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흥미로운 소재와 전개에 비해, 점점 싱거워지는...

 

 

하드코어물에 대해 리뷰하면서, '하드코어' 장르에 대한 이야기도 몇 번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소재와 클리셰가 있지만, 결국 비일상, 비상식, 초자극의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하드코어라고 불리는 걸 거예요. 확실히 하드코어를 무난한 장르라고 부르긴 힘들 것 같네요. 그런 점에서 마크다운 백포백에서 하드코어 작품들의 등장 빈도가 늘고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 놀랍습니다. 사실, 백포백은 생각 없이 결재하는 사람으로서, '방 탈출 게임'이 하드코어인지 모르고 봤어요. 다 읽고 보니, 제목이 제법 의미심장하더라고요.

 

원래 하드코어는 따지지 않고 봅니다. 상식을 기준으로 하드코어 작품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면, 카오스에 빠질 거예요. 애당초, 그게 그 장르의 재미이고 기발함이니까요. 그럼에도, '방 탈출 게임'은 좀 잉?스럽긴 합니다. 상황과 인물을 납득시키려는 설명이 공연히 아귀가 엇나가게 만든 것 같달까요. 그럴 거면 차라리 분량을 늘리고, 설정을 좀 더 촘촘히 다져서 스릴러물로 만들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드코어치고는 수위나 배덕감은 낮기도 하고 말이죠.

 

'방 탈출 게임'은 흥미진진하게 시작합니다. 밀실에 갇힌, 서로의 학창 시절 치부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대면 대면한 동창들이, 합성 사진 속 잔인하게 죽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공포를 느끼고 있을 때, 그들은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흥분성 마약에 노출됩니다. 줄어드는 시간과, 미션을 완료해야만 탈출할 수 있다는 압박감... 첫 번째 방에서 4명의 동창들은, 법률 조각 사유를 들며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재경을 섹스토이에 앉히고 유린해요. 방을 탈출하기 위해, 미션이 요구한 사진 속 재현에 충실하면서요.

 

두 번째 방으로 이동했을 때, 4명의 동창들은 장시간 마약에 노출된 상태였고, 이미 첫 번째 방에서 평소라면 감히 시도도 못할 자극적 쾌락을 맛본 뒤였죠. 게다가, 두 번째 방은 완벽한 퇴폐의 방이었어요. 그곳에는 번호가 매겨진 섹스토이와, 합성된 재경의 사진이 놓여 있었죠. 하지만, 그들은 이제 사진을 재현하는 것에만 몰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호스트가 요구하지도 않은 방법으로 섹스토이를 사용하며, 괴로워하는 재경의 모습을 즐기다가, 준환을 시작으로 재경을 강간하기 시작하죠.

 

넝마가 된 재경이 세 번째 방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먹은 백신의 정체를 확신해요. 그리고, 세 번째 방에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마약에 취한 4명의 동창들은 미션도 없이 재경에 달려들어요. 오로지 재경만이, 맑은 정신으로 그 고통을 당하고 있었죠. 그 백신은 재경에게 진짜 Poison이었어요. 그리고, 그때 등장하는 이 게임을 만든 호스트! 바로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글을 그다음부터는 좀 싱거워집니다.

 

'방탈출 게임'은 하드코어치고는 씬의 특이점이 없어요. 24세 청년들은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았답니다. 게다가, '폭행당하는 자신을 찍는 재경의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는 것이 방 탈출 게임을 기획한 이유였다는, 호스트 건우도 좀 허무했습니다. 차라리, 짧게 끝내야 했다면, 호스트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열린 결말로 마무리 짓는 것이 더 완결성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솔직히, 방 탈출 이후 건우의 집으로 이동한 후 이야기는 긴장감도 없고, 의미도 없고... 건우는 절륜하고, 재경은 갇혔다.라는 말을 늘려 쓴 것 같달까요.

 

게다가, 고등학생인 건우가 따돌림당했던 이유는 아버지가 낙선한 의원이었고, 선거 자금을 많이 소진해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라는데, 24살의 건우는 엄청난 재력가이고 약지가 잘린 동창의 고용주예요. 그 연결고리가 너무 헐거웠어요. 차라리 건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학폭 피해자였던 찌질이가 사실은 사이코였다! 면 미싱 링크는 없었을 듯해요. 잘 조작된 장소, 모호한 관계, 생존 본능과 폭력적 욕구가 가학적 행위를 합리화해주는 '미션'이라는 설정... 정말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은 작품인데, 아쉬워요. 뒷부분에서 너무 많이 희석됐어요.

 

'방탈출 게임'의 외전 격인 '방탈출 게인-보너스 트랩'는 정말 사족이었습니다. 재경이 건우의 집에서 탈출하는 내용인데, 긴장감도 없고, 예상하다시피 건우는 모든 것을 알고 지켜보고 있었죠. 그리고 재경은 건우에게 길들여진 자신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결국 다시 건우에게 안착합니다. 건우는 손쉽게 재경을 다시 감금하고, 재경은 탈출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해요.

 

본권 2/3까지가 좋았어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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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시크노블

출간일: 2017.12.15

분량: 본편 4권

 

 

point 1 책갈피

"...느는 그 섬서 암것도 아니었다. 적해도 섬노, 입 구멍 아랫도리 돌려쓰는 노예, 돈 몇천 원 받고 죽어라 일해서 몇십억 벌어다 주는 머저리 새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애인은 왜 시킸냐고? 느 구멍 내만 쓸라고 시킸다. 줘 패 놓고 로션은 왜 사다 주고 기름은 왜 사다 줬느냐 물었시? 구멍 쓰는 맛 안 떨어지게 관리하라고 줬다."

"......"

"느가 백날 일 다니던 양고미 밭 바로 앞 절벽, 느 애미 시체 거 있다. ... 즈는 지 애미 뼈가 코앞에 있는지 코밑에 있는지도 모르는 등신 새끼였시. 애미 보는 앞에서 구멍 따이고 애미 머리 위에서 궐련이나 피워 대는 머저리를 뉘 사람 취급 해 주간? 사람으로 안 보여 밉도 않았다."

철썩! 장우가 맞을 멎음과 동시에 이매의 손이 휘둘러졌다. 빛이 있음에도 어둠기만 하던 상자에 날카롭게 울린 소리에 다가오던 구두 소리가 우뚝 멎었다. 장우 뒤에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크게 벌렸다.

불편하다 못해 섬뜩한 정적이 흘렀다. 돌아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굳어 버린 장우가 거친 숨을 내쉬는 소리,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장우를 노려보는 이매의 악문 이가 갈리는 소리가 짤막짤막하게 정적을 깨트렸다.

"...똑치 사람 배에서 사람으로 났긴데 왜 섬노만 사람 아닌데요."

point 2 줄거리

기: 험한 바닷길을 지나야 닿을 수 있는 오지 섬 적해도, 40명이 채 되지 않은 주민들이 대마를 제배하고 있다. 마약상 기현오와 남정태는 마약 '작업'을 위해 적해도로 들어가고, 돈이 두둑한 '객'을 이장은 받아들인다. 이장은 심부름꾼 이매를 시켜 객들의 식사와 잡일을 수발들게 했다. 기현오는 이매를 눈여겨보고, 곧 그가 대마 재배와 제조에 재주가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이상스러운 행동의 이유도 알게 된다. 그는 섬노였던 것이다.

승: 적해도의 섬노는 인간이 아니다. 앓다 말라죽을 때까지 섬 주민들에게 아랫도리 시중을 들어야 하는 여자 섬노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남자 섬노는 굻어 죽거나 맞아 죽을 때까지 일하며 조리돌림 당해야 했다. 이매를 포함한 섬노는 3명, 그들의 삶은 시궁창이었다. 기현오는 그런 이매를 보며 분노를 느끼기 시작하고, 그 섬을 '정리'하려 한다. 기현오는 섬주민들을 헤로인에 중독시키고, 살인, 병화, 인신매매를 서슴지 않으며 섬을 장악하고 섬노들을 탈출시킨다.

전: 그 과정에서 이매의 출생 비화를 듣지만, 차마 알리지 못한다. 한편, 뭍으로 나온 섬노들은 인간다운 삶은 찾는다. 말과 생긴 건 험하지만 정 많은 정태는, 가족처럼 2명의 섬노를 챙기고, 현오는 이매와 연인이 된다. 이매는 처음으로 글자를 익히고, 노예가 아닌 '사람'이 사는 법을 배운다. 그러던 중 현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매는 현오의 '고객'을 만나고, 그를 피하려다 만난 무당에게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현오의 이야기와 너무 다른 잔혹사였다.

결: 현오는 결국 이매의 원해는 굿을 해주며, 알고 있었던 어머니의 삶을 알려준다. 현오는 이장과 이장 아들의 단죄를 이매에게 맡기고, 이매는 섬노로서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이매는 현오의 마약 작업장이 되어 버린 적해도를 선물로 받는다. 한편, 이매를 건드린 '고객'에게 경고하기 위해 짜인 판에 이매가 등장하는 예외가 발생하지만, 현오의 계획대로 무사히 흘러간다. 현오와 정태, 3명의 섬노들은 '악인'이 사라진 적해도로 휴양을 떠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악을 벌하는 악

'정당화된 폭력'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둥근 세모'처럼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교사의 채벌은 정당한가요? 저는 훈육의 도구로서 채벌이 얼마만큼 효과적이냐 따지는 사람들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린다는 것이, '방법' 중 하나라고 믿는 점이 소름 끼치거든요.

무서워하는 사람을 다루는 건 쉽습니다. 그래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후배나 고용인, 부하직원, 심지어 서비스 직원에게조차도 공포감을 형성하고, 홀로 도취감에 취해 좌지우지하려 들어요. 편하게 내 맘대로 조종하고 싶어 하죠. 그들의 공포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황, 생활, 생존, 생계에 대한 것임에도, 그 순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게 공포죠. 마비시키고, 전염되고, 정당화되는 '고질적 악'이요.

때려 본 사람은 계속 때리는 것에 무감해지고, 때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손을 쉽게 올리지 않습니다. 폭력은 발생하면 무뎌지고, 무뎌지면 고착화되죠. 그런데, 폭력이 '수단'이나 '관행'으로 여겨지는 집단을, 법이나 도덕이 바꿀 수 있을까요? 그럼 어린 생명을 물고문해 죽이고도 몇 년 뒤면 출소할 아동학대범과, 평생 악몽에 시달려야 하는 피해자가 있음에도 나라에서 주는 기초연금을 받으며 일상을 누리는 성폭력범이 있는 사회는 공평한 건가요? 법은 법이죠. 하지만, 왜 폭력이 더 우월한 시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까요? 그래서, '악을 벌하는 악'을 바라게 됩니다.

적해도의 주민들은 폭력에 무감해진 악인들입니다. 스스로가 악인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악이 들러붙은 땅이죠. 그들은 묻에서 소히 '끈 떨어진', 즉 연고가 없는 아이들을 끌고 와 섬노로 부립니다. 굶기고, 때리고, 가두고, 화장실 가는 듯 강간하고, 그들이 피 흘리고, 부러지고, 곪어터지는 것을 즐기죠. 화풀이로 때려죽이고, 곶굴에 가둬 굶어 죽여도, 곧 또 다른 섬노를 데리고 와 그들의 일을 시킵니다. 이를 아는 섬노는 감히 도망갈 생각을 못 하고, 도망가려다 들킨 섬노는 바로 맞아 죽어요. 적해도는 완벽한 악인들의 '불가침 성지'인 셈이죠.

그런 악인들의 땅에 더 쎈 악이 들어옵니다. 기현오는 확실한 악입니다. 그는 사람도, 법도 미치지 못하는 천해의 마약 작업장이 탐났고, 대마를 다루는 재능을 가진 이매가 필요했죠. 섬주민들을 헤로인에 중독시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이고, 이장은 손발을 뚫는 고문도 하고, 박씨 형제는 태워 죽이고, 남은 주민들은 연변에 팔거나 다른 섬 일꾼으로 보내요. 그 섬엔 현오의 대마를 키워 줄 새로운 섬노들이 들어와, 뭍사람들을 중독시킬 아편을 열심히 키우고 있습니다. 현오는 엄연한 '약탈자'에요.

그럼에도 기현오 앓이를 가능케 하는 이유는, 현오가 '무엇' 때문에 분노했는가? 바로 그 '무엇'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오는 죽도록 일을 하면서도 '돈'대신 '끼니'를 받는다는 이매의 말에, 성시중을 들고 3장을 받는다면서 오만원이나 만원짜리 지폐를 낯설어하는 그의 눈짓에, 패악질에 얻어터지면서도 엎드려 죄를 비는 모습에, 분노합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차려준 식사를 칭찬해 주는 것만으로도 들떠 기뻐하는 이매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싶어, 글을 알려주고 과자를 사 먹이죠. 아파하는 것을 보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섬 밖에 악인과 섬 안에 악인은 그것이 달랐어요.

1권은 섬노의 비참한 생활, 2권은 현오가 섬을 정리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다 보니, 현오와 이매의 본격적 애정사는 3권부터 시작합니다. 쓴맛과 단맛의 비율 상, 단맛이 좀 더 적습니다. 게다가 쓴맛이 엄청 독하니, 현오의 집착 한 꼬집 다정함과 이매의 엉뚱 발랄 뭍생활이 달달해도, 전체적으로 무겁습니다. 피폐물은 설정상 어느 정도 잔인성을 깔고 있고, 사패나 연쇄살인범도 드물지 않게 등장하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으로 느껴지기에 즐길 수 있는 거 같아요. 근데, '적해도'는 아닙니다. 가상이되, 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아요.

물론, 이매와 수향, 철호의 뭍생활은 귀엽습니다. '잘 지냈다.'라는 인사가 '살쪘다.'인 세 사람의 해우는 가슴이 아팠지만, 카페 메뉴를 섭렵하고, 수향에게 휴대폰 사용을 교육받으며 쩔쩔매고, 도무지 100점이 나오지 않는 받아쓰기 점수에 낙담해하는 모습이 흐뭇합니다. 수향과 철호를 돌보는 정태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인 같고, 이매를 애지중지하는 현오의 모습은 풋풋한 소년 같아요. 그들의 직업이 사람을 타락시키는 일이고, 살인, 고문, 협박을 태연히 저지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세 사람에게는 상량한 구원자였죠.

현오와 정태가 살린 사람보다 죽인 사람이 많고, 섬주민 수보다 섬노의 수가 적으니, 현오와 정태가 죽고 섬노가 학대 당하는 것이 전체의 공리는 더 높을지도 모릅니다. 더 옳은 결정처럼 보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왜 이장과 청년회장에겐 조금의 동정도 들지 않고, 현오와 정태는 기특하고 장해 보일까요?

건강한 한 사람을 죽여 그 장기로 열 환자를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방법'이 될 수 없고, 이득을 따져 볼 필요도 없죠. 정당화된 폭력 따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폭력의 유용함을 따져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게 용납되는 사회라서, '섬노'가 '유니콘'이 아닌 세상이라, 악인에게는 악인이 되고, 선인에게는 선인이 되는, 그런 악인에 쾌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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