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1 책갈피

" 빛이 하연준 씨를 좋아하나 봐요. 예뻐서 자꾸 보고 싶은 거겠지, 내가 그런 것처럼."

"......"

"하연준 씨는 내가 알고, 또 내가 생각하던 모든 걸 다 바꿨어요."

"......"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했던 것들이 다 기억이 안 나... 널 본 그 순간만 또렷해."

"저도... 저도 그래요. 배우님을 처음 봤던 그 순간이 아직도 또렷해요. 배우님만 보였어요. 다른 건 하나도 안 중요했어요."

연준의 초점이 평생 저에게만 맞기를 바랐다. 서정원은 식탁 위로 손을 뻗어 저를 향해 손을 내미는 연준의 손가락 끝을 살짝 문질렀다. 고작 손가락이 닿고, 얽혔을 뿐인데 긴장하는 얼굴이 예뻐 눈을 뗼 수가 없었다.

point 2 줄거리

기: 하연준의 삶은 불행했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만, 고모가 가해자에게 합의금을 받아 처벌하지 못했다. 고모는 연준 부모님의 보험금과 합의금을 받고도, 연준에게 눈치를 주며 박대했고, 사이코 사촌 형은 밤마다 연준의 방 문고리를 흔들어댔다. 결국, 연준은 지옥 같은 고모의 집을 나와 달동네에 혼자 살고 있었다. 사촌 형이 달동네 집으로 찾아올까 봐 무서웠던 연준은, 알바비 중 월 15만원만 남기고 모두 고모한테 보내며,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승: 그런 연준에게 유일한 행복은 배우 서정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따돌림으로 극한에 몰린 연준은 정원의 드라마를 보며 위로받았고, 그 이후로 정원에 골수팬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정원이 연준 앞에 나타난다. 달동네 연탄봉사를 나온 것이었다. 정원의 회사는, 이미지 관리차, 예쁘장한 달동네 팬과 정원의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 정원 앞에서도, 좋아한다는 티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연준의 모습에 정원은 죄책감을 느낀다.

전: 인간 자체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정원은, 연준에게 마음을 쓰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죄책감이라고 생각하고 잘 대해줬지만, 그 후에도 계속 연준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준이 자신의 손을 어설프게 잡은 날, 연준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한다. 정원은 연준를 집에 감금하고, 매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연준을 집에 들이지만, 정원의 사랑은 예상보다 격정적이었고, 연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욕심조차 접게 된다.

결: 한편, 정원은 연준의 사촌 형을 들쑤시고, 결국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찌르게 만든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연준은, 정원을 다치게 만든 죄책감에 집을 나와 달동네로 돌아간다. 하지만, 연준과 정원도 이미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정원은 연준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연준의 고모와 사촌 형의 목줄은 정원이 쥐고 있었고, 정원은 연준이 받았어야 할 것들을 받게 해 준다. 두 사람의 격정멜로는 현재 진행 중이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격. 정. 멜.로.

'멜로'... '멜로'의 역사를 풀자면, 근대 유럽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물론, BL을 리뷰하면서, 가치관 전복과 여성운동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확실한 건 '멜로'라는 장르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왔다는 것이고,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죠. '여자들의 최루탄' '골 빈 통속 장르'로 비하 될 만한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요즘은 그마저도 찾아보기 힘든, 화석 같은 존재가 되긴 했지만요.

'로맨스'와 '멜로'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신파'적 요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파'를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작위적 설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확실히 '신파'가 감정의 폭이 크고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는 극적 전개이다 보니, 세련미나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기도 합니다. 죽을 만큼 사랑하고, 죽을 만큼 슬퍼하고, 죽을 만큼 그리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죠. 왜, 어떻게, 무엇을 같은 질문은 미뤄두고, 오로지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격정'이라는 수식어가 '멜로'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클레어님은 다작의 네임드 작가님이시지만, 개인적으로 저와는 잘 안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격정 멜로'라는 제목에 꽂혀서 읽었고, 결론적으로 만족했어요. 제목을 보고 예상했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었죠. 물론, 그간의 클레어님 작품을 읽을 때면,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요소들이 없기도 했고요. 설정만 잘난 공, 신경과 진료가 필요한 수, 해저터널 같은 고구마 전개 말이에요.

'격정 멜로'는 지독하게 불행한 삶 속에서, 동아줄 마냥 서정원이란 배우를 좋아하는 힘으로 살았던 연준이, 우연히 봉사활동 차 달동네를 찾은 정원을 만나 성덕이 되는 이야기예요. 전형적인 할리킹이죠. 그래서, '격정 멜로'의 포인트는 연준이 아닌 정원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원은 연준과 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집 안이 부유해 가난을 모르고, 넘치는 인기를 누리며,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죠. 하지만, 역시 불행했어요. 부모에게 비난받고, 인간을 혐오함에도 사랑하는 척 연기하고 살아야만 했으니까요. 정원은 거짓말 잘하는 기술을, 최고로 인정받은 셈이었어요.

정원은 까칠하지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런대로 배우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오기로 시작해, 큰 목표나 야망 없이 사는 무미건조한 삶... 너무 오래 사랑을 안 해서, 사랑할 수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 소설의 대사처럼 말이에요. 그러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좋아하는 연준을 보게 됩니다. 싸가지 없게 굴어도, 욕을 해도, 심지어 아프게(?) 해도 한결 같이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 일생 정원의 심장을 묶은 고삐가 풀립니다.

'결정 멜로'는 고구마 구간이 없습니다. 이것저것 눈치 보고, 복잡한 관계와 복층적 감정에 혼란스러워하고, 이리저리 찔러보는 과정이 없습니다. 가장 긴 삽질 구간이 사촌 형이 정원을 찔렀다는 것을 알게 된 연준이 죄책감에 달동네로 돌아온 부분인데, 하루 만에 해결돼요. 함께 있고 싶으면 동거하고, 걱정되면 물어보고, 화가 나면 복수하고, 미안하면 사과하죠. 사랑을 표현할 때는 사랑하는 만큼,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는 관여치 않습니다. 그래서 사건 전개는 단순하고, 캐릭터는 일차원적이에요. 나쁜 놈의 이면도 없고, 좋은 놈이 변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에너지는 '사랑하는 데'만 씁니다. 절절하게 고백하고, 애절하게 만지고, 격정적으로 사랑하죠. 그냥, 연준과 정원의 삶 자체가 한편의 멜로드라마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원의 모든 관심사는 연준이었고, 연준의 유일한 중요사항은 정원이었어요. 연준을 감금할 계획을 세우던 집착공은,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자신을 홀로 기다릴 연준을 가슴 아파하며, 연준이 원하는 수능 공부를 지원해 줍니다. 또, 대학은 안 보내리라 계획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연준을 보며 아직 나오지도 않은 장학금에 질투도 하죠. 정원의 계획, 살아왔던 삶의 방식, 모두 '연준' 앞에선 무효가 됩니다.

이런 사랑을 받으면, 조금은 변할 것도 같지만, 연준은 오로지 정원만 봅니다. 정원이 하자고 하는 건 무조건 좋고, 정원이랑 같이 있는 시간은 무조건 행복하고,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나 뿅~가죠. 연준은 절대적 약자이자 모순 없는 선인이고, 고모와 사촌 형은 반전 없는 악역이자 전형적 속물이에요. 그래서 정원은 밑도 끝도 없이 연준에게 빠져들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엔 오해도, 갈등도, 실망도 없거든요. 오로지, 두 사람을 둘러싼 적들이 있을 뿐!

하지만, 이런 점이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매일 연재로 볼 때는 '오늘도 그들을 달달하였다!'지만, 한꺼번에 보자면 씬+애절+씬+애절+씬+애절의 무한 루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격정적 감정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싶은 날에 선순위로 떠오를 작품임에도, 정주행을 생각하면 망설여집니다. 공수가 예쁘게, 한결같이, 사랑하는 모습만 보고 싶다! 하는 독자에게는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이고, 사랑도 좋지만 내용도 필요해!라는 독자에게는 다량의 스킵 구간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격정 멜로'는 회당 4천 자 이상의 분량을, 주 7일 연재(초반부는 주 5일 연제)로 휴재 없이, 100화 이상의 장편으로 마무리 한 작품입니다. 물론, 할리킹 클리셰를 '멜로'로 풀어낸 시도도 좋았지만, 작가님의 성실함과 책임감에도 감동받았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진지충의 Review에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인성이 좋은 작가의 작품이 꼭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면 작가의 인성은 상관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작가님의 좋은 면이, 작품을 읽을 때 독자에게 주는 선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저는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많이 기대하게 되었어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