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모드

출간일: 2020.02.19

분량: 본편 2권

point 1 책갈피

"룸 하나 남았다는 호텔 있어."

"안가. 귀찮아. 재미없어. 차 세워."

이우는 들은 시늉도 하지 않고 빗길을 헤쳐나갔다. 지건의 안색이 굳어졌다. 묵묵히 핸들을 올리는 그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날을 세웠다.

"안 들려? 차 세우라고."

"......"

"이 씨발놈아! 귓구멍 처 막혔어?! 차 세우라고!!"

이우는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짜증스럽게 흩트려 넘기며 액셀 페달을 길게 밝았다. 투둑투둑-앞면 유리창으로 날아온 빗방울이 속절없이 부딪혀 깨졌다. 빗소리에 묻힌 실내는 짙은 음영에 잠겨 들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차가운 침묵을 뚫었다.

"나를 잃어가고 있어."

저를 보는 지건에게 향한 것인지, 자신에게 뇌까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우는 차분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알아? 고장 없이 째깍째깍 돌아가던 세계가 어느 날 멈춰버린 기분이야. 지금까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

"......"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그 막막한 기분을, 네가 이해할 수 있겠어?"

가라앉은 이우의 눈동자는 순간순간 드리워지는 가로등 불빛에 반짝였다. 지건은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늘 머물러 있던 미소도, 웃음도 없는 얼굴은 고통에 시달린 자의 모습이었다. 한낱 욕심에 눈이 멀어 무엇보다 소중한 이의 일상을 빼앗은 자신의 이기에 지건은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꼈다. 그는 앞만 응시하는 이우를 바라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그 오래전에 나를 잃어버렸어."

꺼질 듯이 낮은 목소리였다. 무거운 빗줄기가 세차게 차 지붕을 두드렸다. 지건은 눈길을 내리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이젠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

이우는 가만히 옆을 돌아보았다. 반대 차선에서 비춰든 상향등이 차 안을 잠시 밝혔다가 이내 사라졌다. 지건은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며 후드를 푹 덮어썼다.

point 2 줄거리

기: 지건, 이우, 태석, 승욱, 병철은 학창 시절 친구다. 그들 중 이우만이 성공한 레스토랑 CEO가 되어 '제대로' 살고 있었다. 지건은 남자에 미친 누나는 둔 전기기사였고, 태석은 돈 많은 집 백수, 승욱과 병철 건달이었다. 하지만, 의리파 이우는 거친 친구들에게도 다정하고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곧 같은 학창 시절 동창이자 10년 사귄 희수와 결혼할 예정인 품절남이었다. 지건은 그런 이우를 남몰래 사랑하고 있다. 희수보다 훨씬 먼저, 오랫동안, 강렬하게...

승: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한 채 돈을 달라며 찾아온 누나 지혜와 싸우고 집을 나온 지건은 우연히 이우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신혼집에서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고백한다. 그 다음날 두 사람은 다시 그 집으로 가고, 지건은 계속 친구로 지내자는 이우에게 강제로 키스한다. 이우는 지건을 밀어낸다. 그 이후 지건은 다시 그 집으로 찾아가고, 이우는 결국 지건의 애원대로 섹스해 준다. 지건은 일을 그만두고 이우의 그 집에 들어가 살며, 이우와 정사를 나눈다.

전: 그러다 희수가 그 집에 오려하자, 이우는 지건에게 돈을 주고 남창 취급하며 내쫓는다. 그렇게 집을 나온 지건은 태석과 만나고, 태석은 지건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 다음날, 이우는 지건을 다시 집에 부르고, 다짜고짜 덮친다. 지건은 자신의 몸에 취한 이우와 다시 그 집에 살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집을 찾아온 희수와 마주치고, 희수는 이우와 지건의 관계를 눈치챈다. 희수는 지건에게 사라져달라고 부탁하고, 지건은 짧은 일탈을 정리하려 한다.

결: 지건은 자신을 찾는 이우를 밀어내고, 그럴수록 이우의 집착은 심해진다. 한편, 지건과 이우는 승욱, 병철의 조직 싸움에 휘말리고, 지건은 이우를 구하다 총에 맞는다. 깨어난 지건은 그 집에서 이우와 보낸 기억을 잃어버린다. 이우는 그런 지건을 보며, 그간의 혼란스러운 감정의 이름을 깨닫고, 희수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우는 태석과 해외여행을 떠나려는 지건을 잡는다. 지건은 기억을 찾고, 이우와 함께 그 집에서 살게 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그 집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에는 '여혐'지뢰가 있습니다. 최근작들에서는 드물지만, 구작에선 비교적 흔했어요. '여혐'은 단순히 '여성 혐오 표현'만을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여자를 질투에 미친, 표독스럽고 이기적으로만 폄하하기도하고, 공수의 사랑을 위해 기만적으로 이용당하거나, 임신을 무기로 사랑을 구걸하다 버림받기도 하죠. 이런 설정은 여자는 '악'이고 공수는 '선'으로, 여자는 '가짜 사랑'이고 공수는 '진짜 사랑'으로 대비해서 부각시키곤 합니다. 00버스 시리즈로 제3의 성이 생기면서, 굳이 구도가 불필요 해진 까닭에 줄어 들지 않았나... 예상해 봅니다. 어쨌든, 이런 작품들에서 여캐는 밉거나 비참해요.

희수는 집 안과 학벌이 좋고, 예쁘데 착하기 까지 한, 공수의 학창 시절 친구예요. 지건은 희수에게 사랑하는 이우를 소개해 주고, 이우는 희수가 드나드는 집에서 지건과 섹스하죠. 지건과 이우 모두 희수를 기만합니다. 희수는 지건과 이우의 관계를 알고 난 뒤, 지건에게 사라져 달라면서도 이우에게는 모른척합니다. 또, 지건에게 남자 간의 관계가 더럽다고 비난하기도 하죠. 헤어질 때도, 차라리 임신을 먼저 할 걸 후회하며, 결국 지건의 사랑이 더 정당하다는 식의 발언을 합니다. 잘 난 여자 희수는 어리석고, 미우면서도, 비참한 캐릭터로 묘사돼요. 강하진 않지만, 여혐 요소가 있죠. 구작인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래서!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가 색다른 배덕과 광기를 지닌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집'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기도 하죠. 결혼 예정인 이우가 새로 산 비어 있는 집, 희수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집, 하지만 이우가 지건에게는 신혼집이 아니라고 말한 '그 집'말이에요.

'그 집'은 배덕과 광기의 장소예요. 그 집에서 일어난 일들이, 지금까지 지켜 온 무사태평한 일상을 뒤흔드는 질척이는 일들뿐임에도, 두 사람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집은 비극의 시작이자, 행복한 결말이죠. 지건의 끈질긴 애걸로 첫 섹스를 하게 된 이우는, 그 다음 모임에 나온 지건을 화장실에서 충동적으로 덮칩니다. 그리고 바로 지건을 그 집으로 데려가, 다시 개걸스러운 정사를 해요. 그 집이 마치, 이우가 지건을 탐하는 것이, 지건이 이우를 가지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 면책의 장소인 듯 말이에요.

왜 이우의 집도, 지건의 집도 아닌 '그 집'일까? 그곳은 이우가 살려고 가구나 짐을 옮겨 놓은 집이지만, 실제로 살았던 집은 아니에요. 이우의 집이지만, '기존'의 이우가 '존재'했던 공간은 아닌 셈이죠. 이우는 그 집을 신혼집이라고 부르는 지건에게 '잘 못 알았다.'라고 말합니다. '그 집'은 도대체 무슨 집일까요? 오로지 그 집을 '신혼집'이라고 생각하고 드나들었을, 희수만이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장소에서 배제된 유일한 사람 말이에요.

지건은 학창 시절 '좋은 여자' 친구인 희수에게 이우를 예쁘게 소개합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건은 서툴고 거친 방법으로 이우에게 고백하죠. 그리고, 폭주 기관차처럼 이우를 향해 돌진합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그 집에서 이우에게 정사를 간청합니다. 그건 결혼을 앞 둔, 오랜 짝사랑과의 좋은 추억 한 자락을 바란 행동은 아니었어요. 마치, 지건은 이우를 부숴버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요. 지건은 이우의 다정함을 원하지 않았고, 결혼 하지 말라거나 이 집을 달라는 등의 어떤 '약속'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계속 그 집을 찾아가고, 이우를 한계까지 몰아부치죠.

저는 이것이 지건 스스로 '짝사랑의 종말'을 고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건은 끊어 낼 수 없는 오랜 짝사랑을 하얗게 태워 소멸 시키고, 끝내 이우에게 내쳐지길 바랐을지 모른다고 말이죠. 지긋지긋한 남창, 친구도 아닌 쓰레기로... 평생 어떠한 접점도 만들고 싶지 않은 존재가 되어서요.

하지만, 지건의 계획은 빗나갔어요. 이우는 잘 생긴 외모와 원만한 사회성을 지닌 엄친아였고, 주변에 넘쳐나는 사람들 중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평범한 삶을 당연히 여겼을거예요. 하지만, 성공한 CEO 이우 안에는 '또 다른 이우'가 있었죠. 그래서, 이우는 학창 시절 자신과 '다른' 친구들을 사귀고, 졸업 후 더 많이 달라진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는' 위치를 고수하며 관계를 유지해요. 희수와 같이 살 집이지만, 신혼집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완벽해서, 깰 수 없는 또 다른 나와의 타협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과묵하고 사려 깊던 지건이 냉소적이고 적대적 태도로 이우를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 끝에 죄책감과 자괴감이 범벅 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죠. 그 뒤 지건은, 마치 내일은 없는 사람처럼 이우에게 막무가내로 굽니다. 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원색적 감정의 폭격 속에 이우의 틀은 깨집니다. 그리고, 이우는 지건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지건을 더 그 집에 두려고 합니다. 집 밖에서 지건을 보며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집 안에서는 지건의 상태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욕정을 풀죠. 그 집은 이우에게 또 다른 나를 방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섭캐인 것 같은 태석이 진짜 의리 갑인 친구였고, 건달 친구들과 함께 위기에 빠지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영화 '친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칠지만, 순수하고, 함께 일 때 무서울 것 없는 사나이들 말이에요. 기억을 잃었던 지건이 회복되고, 이우와 연인이 될 때도 친구들은 두 사람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감방에 간 승욱과 병철, 게이인 지건과 이우는 함께 똘똘 뭉칠 수 있지만, 희수는 어디에...

어쨌든, '잔물결에 지나지 않는다.'는 매력적인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단지, 좀 짧아요. 지건이 기억을 잃은 후 이우가 매달리게 되는 과정이 다소 간략해서, 이우의 급변이 다소 캐붕스러웠죠. 같은 이유로, 갑자기 지건에게 쩔쩔매는 이우와, 이우에게 단호하고 염치 있어진 지건의 외전도 좀 아쉬웠습니다. 3권 정도로 쓰였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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