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1 책갈피
그래, 어떻게든 방법은 생기겠지. 찾아보면 어딘가에는 있겠지, 둘 다에게 좋은 방법이.
생각하며 지헌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터널을 지나듯 짧은 어둠이 지나가고, 다시 환한 수영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발치에는 어린 재경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여기서 뭐해요?
웬일로 먼저 말을 건담. 지헌은 신기해하며 대답했다.
-너 보고 있었다, 왜.
나를요? 하듯 재경이 눈을 깜박였다. 곧바로 뭐야, 하고 작게 웅얼거리며 새침 떠는 표정이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보고 있노라니 지헌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왜 몰랐을까.
재경은 정말 자신만 보고 있었다. 한결같이 자신만 보면서도 한결같이 서툴러 표현도 한 번 못 했다. 그게 새삼 사랑스럽기도 하고, 조금 마음이 아프기도 해서 지헌은 살짝 목멘 소리로 물었다.
- 너 혼자 심심하지도 않냐?
- 수영하는데 왜 심심해요?
재경이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비비며 지헌에게 물었다.
- 형은 수영할 때 심심해요?
- 아니, 나도 심심하진 않아.
지헌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무도 없는 풀을, 그 고요한 수면 위로 하염없이 반짝이는 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그런데 가끔 외롭긴 해.
곧바로 재경이 말했다.
- 나랑 같이 있는데 왜 외로워요?
그 뜻밖의 말에 지헌은 다시 고개를 숙여 눈앞의 아이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다 커버린 재경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형 혼자 아니잖아요, 이제.
그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더니 손을 뻗었다. 지헌이 그 손을 붙잡자 재경이 그대로 끌어당겼다. 지헌은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따뜻한 물이 순식간에 온몸을 감쌌다. 차가울 줄 알고 겁먹었던 지헌은 그 익숙한 온도에 곧 마음을 놓고 더 깊이 가라앉았다. 물속은 언제나처럼 평화롭고 안온해서 그저 가만히 잠겨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이 상냥한, 마치 위로 같은 포옹을 지헌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받아들여 줄 수 있을 만큼 넉넉하고 다정한 온기, 바로 재경의 품이었다.
point 2 줄거리
기: 그랜드슬램 달성을 목전에 둔, 천재 수영선수 권재경은 슈퍼스타다. 당연히 권재경과 계약하려는 에이전시 간 경쟁은 치열했고, 국내 최대 스포츠 에이전시 '카바'는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한다. 하지만, 재경은 뜻밖에 소형 에이전시 '스포인'과 계약을 체결한다. 이유는 스포인 정지헌 대리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면 계약 때문이었다. 재경은 어릴 적 우상이자 첫사랑인 지헌에게, 광고를 찍을 때마다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달라고 한다.
승: 지헌은 세계선수권에서 메달을 딴 국가대표였지만, 오메가 발현과 어깨 부상으로 인해 수영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 선택을 계속 후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자신을 기억하는 재경의 애정공세가 불편했지만, 사회성 갑인 지헌은 재경과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카바'의 더러운 뒤 공작에 휘말려, 재경이 불명예스럽게 은퇴를 할 위기에 처하자, 지헌은 재경에게 다음 올림픽을 나가자고 애원한다.
전: 재경은 올림픽에 나가는 조건으로 지헌에게 섹스를 요구하고 지헌은 수락한다. 원래 지헌바라기인 재경과 재경을 아끼는 지헌은 몸정을 쌓으며, 감정 역시 깊어진다. 그러던 중 재경과 지헌은 스타와 매니저가 함께 하는 버라이어티를 찍는다. 한편 지헌의 페로몬이 재경에게 영향을 주자, 지헌은 무리하게 칩을 사용하다 쓰러지고, 그런 지헌을 보며 괴로워하는 재경에게 지헌은 고백한다. 때마침 쇼프로가 방송되면서 둘은 공인커플이 된다.
결: 지헌과 재경은 히트와 러트를 함께 보낸다. 한편, 재경이 올림픽에 나가게 되면서, 역공을 당했던 카바와 수영연맹은 원한을 품는다. 올림픽 1차 선발전에서 재경을 흔들려고 수작을 부리다, 지헌이 폭행당하는 사건이 터지고, 2차 선발전에서는 지헌의 페로몬을 걸고넘어진다. 하지만, 지헌의 임신 사실일 밝혀지면서 완전 실패로 돌아가고, 재경은 올림픽에서 메달 8개를 획득하는 쾌거를 이룬다. 재경과 지헌은 서로에게 청혼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반드시 이긴다.
아직까지 리뷰하지 않았지만, 저는 이젠님의 최고작은 '프라우스 피아(Fraus pia)'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DASH'로 바뀌었어요. 'DASH'라는 명작을 만난 것도 매우 기쁜 일이지만, 이젠님의 다음작이 나올 때마다 '최고작'이 바뀔 것 같다는 기대감이 더 기분이 좋습니다. 구작을 재탕하며 그리워하는 것보다, 새 작품을 고대하며 느끼는 설렘이 더 즐거운 법이죠.
저는 이젠님의 강점이, 탄탄한 구성력과 세심한 디테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서사를 쌓아 올린 것 같다. 반면, 강렬함은 적다. 이젠님 작품에 대한 기존 저의 감상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DASH'는 머리에 각인되는 장면이 제법 많습니다. '책갈피'를 선택할 때, 떠오르는 씬이 없어 어려운 작품이 있는 반면, 너무 많아 어려운 작품도 있는데, 'DASH'는 후자였습니다. 정말 어려웠어요.
물론, Killing point가 많은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사만 힘준 작품들은... 부끄러워요. 수치심과 오글거림은 독자의 몫인가? 싶죠. 하지만, 인상적인 장면이 없는 작품들이 오래 기억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DASH'는 이젠님의 강점에 다른 강점까지 더한 셈이죠.
'DASH'의 줄거리는 뻔하고 간단합니다. 천재적 재능과 우성알파의 형질, 잘생긴 외모, 강철 멘탈을 지닌 재경이 사랑과 금메달 모두 성취하는 내용이죠. 아마, 이 이야기를 보며 지헌과 재경이 맺어지지 않는다든가, 재경이 올림픽을 나가지 않을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카파의 수작과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위기는 맞지만, 의외성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DASH'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그 '과정'이 뻔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일단, 재경과 지헌의 캐릭터가 재미있습니다. 재경은 수영 1등인 사회성 파탄자에요. 지헌은 수영을 포기한, 사회성 갑 인기인이죠. 재경은 사랑은 아는 반면 연애는 모르고, 지헌은 사랑은 초보, 연애는 만랩이에요. 재경은 이기는 것만 관심이 있고, 지헌은 실패하지 않는 것만 골몰합니다. 재경은 서툴지만 안하무인이고, 지헌은 노련하지만 겁쟁이에요. 두 사람은 홈과 고리가 맞닿은 퍼즐처럼, 서로의 부족과 과잉이 정확히 맞아떨어져요. 물론, 다른 말로 하자면, 삶의 방식이 완전 반대라는 거죠.
상극인 공수가 맞춰간다고 하면 배틀연애나 티키타카를 떠올리기 쉬워요. 하지만, 놀랍게도 'DASH'에서는 그것들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두 사람도 말싸움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한 쪽이 다른 쪽을 설득하는 것이 내용이고, 두 사람은 반드시 합의점을 찾습니다. 평행선, 삽질, 고구마, 밀당, 요런거 없습니다. 이렇게 다름에도, 치고받는 열전이 없는 이유... 재경은 한결같이 지헌을 원하고, 지헌은 늘 재경을 위하기 때문이죠.
수영을 사랑했던 지헌은 국내를 휩쓴 천재였고, 최연소 세계 선수권 메달리스트였어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세계 선수권 메달은, 지헌에게 수영선수로서의 미래를 비관하게 만듭니다. 때마침 진짜 천재의 등장, 어깨 부상, 오메가 발현까지 이어지면서, 지헌은 수영을 그만두죠. 하지만, 그 결정은 연이은 악재를 핑계로 스스로 '포기'한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후, 지헌은 정말 열심히 살지만, 여전히 후회스러웠고 공허했고 외로웠죠.
그런 지헌에게 재경은, 부끄러운 과거의 단편이자 이루지 못한 꿈이었어요. 지헌이 두려워 한 실패가, 수많은 연애를 통해 깨달은 무상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지헌은 절실히 사랑했던 수영이 남긴 상흔처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재영과 헤어진 후 남을 후울증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죠. 지헌은 복잡합니다. 다만, 재경이 후회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만은 헷갈리지 않아요. 이를 위해서라면, 재경의 말도 안 되는 요구도 받아들입니다.
반면, 재경은 명료해요. 재경은 부지불식간에 지헌을 놓쳐 버립니다. 이후 지헌과 닮은 사람도 만나지만, 지헌의 자리는 조금도 메꿔지지 않았죠. 재경은 10년간, 찾을 수 없는 지헌을 홀로 사랑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지헌을 만나고, 맹렬히 DASH 해요. 골인점은 분명했고, 수영에 빽은 없습니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고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은 빨리 가고 있는다는 증거고, 재경이 제일 잘하는 일이었어요.
또, 심플한 줄거리의 탄탄한 디테일도 뻔하지 않은 중요한 요인이죠. 'DASH'는 수영 선수가 엮일 수밖에 없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비교적 자세히 다룹니다. 재경이 '잘 생긴' '비인기 종목'의 '천재' '메달 사냥꾼'이니 더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간혹 박태환 선수의 인터뷰도 떠올랐습니다. 모처럼 재능 있고 성실한 선수가 생겨도, 운동이 아닌 이권 다툼의 희생양으로 도마에 오릅니다. 스포츠라는 것이, 고수익 산업이고 한철 사업인데다가, 선수는 대중적인 반면 업계는 불투명하고 수직적이고 폐쇄적이다 보니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DASH'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열폭을 부르는 '카바'의 김기석, 한유성, 섭캐인줄 알았는데 엑스트라였던 최성현, 송연호를 비롯해 대한체육회, 수영연맹, 스포인과 재영 지헌의 가족들까지... 모두 나름대로의 성격과 이권으로 재경에게 '주장'을 합니다. 우성알파라니 비겁하다, 넌 성격이 문제다, 너 결정은 이기적이고 후배들을 생각 안 하는 거고, 운동선수의 자세는 어떻고 등등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비난하죠. 통제하고, 흔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재경은 일반인이 아니었고, 강철 멘탈의 소유자였어요.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간혹 간헐천은 뿜어내지만 독설로 즈려밟고 깔끔하게 무시하죠. 재경은 사람을 노련히 다루고, 사태를 원만히 해결하는 지헌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지헌은 재경의 그 드높은 자존감과 자신감을 부러워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챙겨야 할 것은 많고 신경 써야 하는 것도 많다. 어른은 멀티태스킹을 잘해야 한다. 하지만, 그건 평화롭게 지지 않는 법이지, 이기는 법은 아닐지도 몰라요.
많은 스포츠 소설들은 '그래서 이겼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가지 장애물과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끝내 승리하는 성장물 말이죠. 하지만, 'DASH'를 보면 '반드시 이긴다.'가 더 어울립니다. 재경은 당연히 이길 거라고 생각하고, 이길 준비만 하고, 이깁니다. 불안해하고, 백업 플랜을 세우고, 우호적 정서를 만들지 않죠. 수영도 지헌에게도 오로지 전진만 합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어요. 다만 될 때까지 할 뿐이죠. 정말 징한, 지독한, 의지의 한국인이에요.
비록 공지는 없지만, 저는 DASH가 외전이 나올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지니'랑 수영장도 가야 하고, 팔불출 아빠의 육아기도 보여줘야 줘. 그저 빨리만 나왔으면 좋겠어요. 현기증 난단 말입니다.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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