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고럼팩토리

출간일: 2020.11.11

분량: 본편 3권

 

 

 

 

 

 

 

 

point 1 책갈피

시동이 사라지고 이화수는 고개를 수그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은월검이 쥐어져 있었다. 마치 평범한 것처럼 무명천으로 둘둘 감싼 그 검은 검집 안에 있어도 검신의 싸늘한 기색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정말로 주룡진이 자신을 이용해 죽기를 바랐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그는 단지......

'......음, 나조차도 예상 못 한 일이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아.'

'그러니까 왜?'

'네게 무언가를 요구받는 게 좋아서?'

좋아서.

그 모든 것들이 좋아서 그랬나 보다.

이화수는 그 검을 집어 들고 스르르 일어났다.

point 2 줄거리

기: 화산파 이화영의 유일한 후계자 이화수는 자신을 납치하려는 마교주 주룡진을 피해 달아나지만 실패하고, 천신궁으로 끌려간다. 파천신공을 익힌 주룡진은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마기를 다스리기 어려워지자, 명문세가나 도가의 자제들을 납치해 겁간하며 양기를 얻어왔던 것이다. 화수 이전에 끌려온 명문세가의 자제들은 죽거나 주룡진의 애첩이 되어 살고 있었다. 한편, 주룡진은 화산파의 봉마주혈로 날뛰는 마기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승: 유용함이 증명 된 화수는 겁간의 위기에 벗어나지만, 주룡진에게 집착하는 당서란에게 시기의 대상이 된다. 화수는 정기적으로 주룡진에게 봉마주혈을 시전하며, 탈출을 위해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런 화수에게 주룡진은 자신의 보검 은월검을 준다. 당서란은 고고한척 하는 화수를 타락시키기 위해 미약을 먹이고, 주룡진과 화수는 뜨밤을 보내지만, 화수는 약이 취해 기억하지 못한다. 한편, 화수의 호위모사 해무영은 화수를 구출하기 위해 방법을 강구한다.

전: 주룡진은 그날 밤 이후 화수에게 애정을 보이고, 그런 주룡진을 대하며 화수 역시 변하기 시작하지만 그 실체를 몰라 혼란스러워 한다. 그러던 중 해무영은 비밀통로를 찾아 화수를 탈출시키지만, 곧 주룡진에게 붙잡힌다. 주룡진은 부상 입은 해무영을 인질로 화수의 몸을 탐하고, 성교를 통해 선기와 마기가 교차되면서 두 사람은 황홀경을 느낀다. 주룡진은 화수를 더더욱 아끼지만, 화수는 그 열락을 느낄수록 마음이 공동화 되어 생에 의지를 잃는다.

결: 한편, 무림맹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주룡진이 자리를 비운 틈에 화수와 해무영를 구한다. 이 소식을 들은 주룡진은 천신궁으로 돌아와 화수가 없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마기가 폭팔한 광마가 된다. 이성을 잃은 광마는 무림으로 화수를 찾아오고, 많은 무림인들이 목숨을 잃는다. 마지막 보루인 파마진 마저 실패한 위기의 순간, 화수는 시종을 통해 전해 받은 은월검을 들고 나타난다. 화수는 주룡진을 살리고 싶은 염원으로 화신의 경지에 이르고, 주룡진의 단전을 파훼한다. 화수는 주룡진과 함께 천신궁으로 돌아간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짐승'... 그리고 '무림기연'

유명한 작품은 많고, 그 중 일부 잘 쓴 작품, 또 그 중 일부 오랫동안 기억나는 작품, 그리고 그 안에서 몇몇만이 인생작이 됩니다. 사람의 사귐과 참 비슷하죠? 말이 통하는 사람들, 그 중 일부가 좋은사람, 또 그 중에 일부 진국, 그 안에서 소수만이 내 인생의 동행자가 되는 것 처럼요.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작품들... 그 인생작 중 한 작품은 분명 이순정님의 '짐승'입니다.

신작 '무림기연'을 읽으면서 '짐승'이 떠오른 이유는 본능적 공과 사회적 수의 조합이나 공이 쉽게 인정하는 애정을 어렵게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수의 도덕관이 유사하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짐승'과 같은 3권의 분량이었음에도 무협물이라 풀어야 할 시대배경과 관계설정이 많아서 였을까요? 이순정님의 강점인 입체적 인물들이 섭섭 할 정도로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고, 회수못한 떡밥은 없었지만 허무한 떡밥은 많았습니다. 그 분량 내에선 최선이었겠지만, 애당초 3권의 분량이 너무 적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이순정님의 입체적 인물묘사를 정말 좋아합니다. 선악과 시비를 나눌 수 없는, 복합적이고 복층적인 인물을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서란'이나 '백효조', '장태주'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그저 소비되어 버린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누구보다 정파의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에, 더 많이 엇나가고 망가져야만 살아 질 수 있었던 당서란의 '집착'이나, 생명이나 평온한 미래보다 더 갈구했던 백효소의 '소속감', 차가운 바위여야 했지만 실은 지하를 잠잠히 흐르던 마그마 같던 장태주의 '애정'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이 쓰입니다. 천금궁이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 감금된채 죽어가는 이들을 보며 생존해야만 했던 너무나 다른 인물들의 이면들이 묻힌 것 같아서요.

한편, 공수의 캐릭터는 매우 선명합니다. 주룡진 예쁘고 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마땅히 가져야하고, 가지는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곁에 두고, 좋은 것을 주고, 도망가면 잡아옵니다. 마치, '짐승'의 사내가 생각이 나죠. 반면, 이화수의 삶은 아버지 이화영의 그림자였어요. 이화영은 화산파 비원인 매령환무검을 통달하지 못해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내고 우수한 무재를 낳기 위해 애정 없는 결혼을 해요. 그렇게 태어난 이하수의 존재 가치는 오로지 매령환무검뿐이었죠. 화수는 세상과 단절 된 채 갇혀, 폭행에 가까운 채벌을 받으며 무술을 연마하고, 매령환무검을 익히지 못한 화수가 이루낸 모든 것들은 인정 받지 못합니다. 가문이 유일한 척도였던 지언처럼, 삶의 선택할 자유는 박탈되요. 정확히는 가져 본 적조차 없죠.

하지만, 주룡진은 사내와 달리 노련한 수장이었고 이화수 역시 도련님 특유의 솔찍하고 제멋대로인 일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룡진은 사내와 달리 화수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꾀어 낼 수 있었고, 화수는 지언처럼 극도로 피폐한 선택을 하기 전에 주룡진에 대한 애정을 인정합니다. 좀 순해진 '짐승'과 부러지지 않고 휘어진 '선비'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야기가 너무 무겁지 않게 깊이를 조절하는 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짐승'을 읽고 폭팔 할 듯 샘솟던 사념이 '무림기연'에서 너무도 잔잔한 것이, 저로서는 지난 작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지네요.

주룡진은 옥루정에 갇혀 파천신공을 익힙니다. 마치, 화산에 갇혀 매령환무검을 익혀야 했던 화수처럼요. 단지, 주룡진은 화수와 달리 성공하여 옥루정을 나오죠. 하지만, 절정고수의 무공임에도 파천신공을 익힌자가 없는 이유는 마기를 잡기 어렵고, 마기을 잡지 못해 주화입마에 들면, 광마 혹은 광신이 되어 인간성을 잃고 살인귀가 되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강제로 익혀야 했던 무공의 부작용에 시달리던 주룡진에게, 그 무공으로 얻은 권력을 누리는 것 역시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양기를 채우기 위해, 정파 제자와 자제들을 납치해와 겁탈하고 죽이면서도 주룡진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요.

주룡진은 죽은자들을 대신 할 자들이 계속 납치하고, 공력이 높아 기력이 빨리고도 살아 남은 자들은 기어코 살려내요. 치욕스러운 겁간에 몇번이고 도망치고 자진하지만 다시 운우정에서 눈을 떠야만 했던 위세높은 공자들은, 서서히 살기 위해 스스로 주룡진에게 길들여지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러다 화수가 나타나죠. 성교가 아닌 방식으로, 여러명이 간신이 잠재울 수 있었던 마기를 홀로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 화수는 주룡진에게 가장 귀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망가지지 않은채, 이제는 자신들이 말할 수 없는 고고한 사변(思辨)을 내뱉으며, 천금궁에서 호위호식하는 자... 화수의 등장은 운우정에 숨죽여 살던 많은 이들을 흔들어 버리죠.

심지어 주룡진 조차도 말이예요. 주룡진은 들끓던 마기가 화수의 선기에 의해 잠잠해지자, 그간 느끼지 못했던 인간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상처받고, 삐지고, 보고싶고, 주고싶은... 만약 언젠가 죽게 된다면 꼭 너였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화산에 갇혀, 친우 한명과 호위 한명이 인간관계의 전부였던 화수 역시 그런 주룡진의 변화에 함께 울렁거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감정들은 화수의 정파 후계자로서 쌓아 왔던 도덕관이라는 허들을 넘지 못합니다. 미약을 먹고 주룡진과 잠을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무영을 살리기 위해 주룡진과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하면서 화수는 텅빈 인형이 되어버리죠.

'무림기연'은 분명 BL장르에서 보기 힘든 제대로 된 무협물입니다. 그럼에도 분량의 한계인지, 주요전개가 너무 후다닥 진행 된 느낌이 있습니다. 화수가 주룡진이 준 영물을 잘 받아 먹고, 영기가 가득찬 천금궁에서 수련을 게을리지 하지도 않았으니, 매령환무검을 통달 한 것이야 그럴 수 있다치지만, 화신등장은... 사랑은 무한의 위대함이라고 이해해야할까요. 어쨌든 극적 반전을 위해서라지만, 화산파 후계자 한명을 살리고자 무림맹이 거의 전멸하고, 광마가 된 주룡진을 살리기 위해 화신의 경지에 도달한 화수는, 주룡진의 단전을 파훼하고 그를 데리고 천금궁에 돌아갑니다.

무림을 떨게 한 광마도 사라졌고, 이제 그가 더 이상 정파의 젊은이를 납치 할 일도 없어졌죠. 이화영은 후계자를 잃었지만, 평생 염원했던 매령환무겸과 화신을 보게 되고, 화수는 자유와 사랑을 찾습니다. 해피엔딩이죠. 그런데 왜 이리 찜찜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주인공만 좋으면 장땡인 할리우드 영화 엔딩 크레딧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결론은, '역시 이순정! 하지만 아쉽다.' 입니다.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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