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비욘드

출간일: 2019.03.21

분량: 본편 4권 + 외전 2권

 

 

 

 

 

 

 

 

 

point 1 책갈피

코와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영인은 심혈을 기울여 한 글자 한 글자를 발음해 냈다. 그리 작지도 않게. 명징한 말투로.

"...규화야."

"아..."

부르는 소리에 기어이 눈을 뜬 규화의 시야는, 그토록 선명했다.

찰나의 머뭇거림. 흔들리는 눈동자, 살짝 힘이 들어가는 손끝. 무얼 그리 어려운 말이라고, 한껏 호흡을 머금는 흉곽의 들썩임까지.

하지만 규화는 다리 눈을 감았다. 시각을 배제한 채, 온전히 만끽하는 그의 목소리에 깃든 모든 순간을 제게로 담고 싶었다. 기억해야 했다.

「다시」

"...규화야."

소리가 영원할 수 없어, 원망하던 날이 있었다. 음악을 하는 이 순간을, 언젠가 소리를 되찾을 영인 앞에 고스란히 전하고 싶은 마음에. 몇 장의 음반을 기획했지만 가장 좋은 소리를 남기기 위해 미루고 또 미뤄 왔었다.

왜 그럼이 아닌 음악이었을까 의미 없는 후회도 했다. 화폭에 담길 그림이라면 전해질 수 있을 텐데. 어째서 음악일까. 애꿏은 운명을 탓하고 신은 없다며 염세주의에 매몰되었던 과거의 문규화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안다. 소리는 순간이기에 아름답다. 감정도 변하기 때문에 더욱 값지다. 영생을 살지 못하는 꽃의 개화가 아름답듯이, 미화되어 버리고 사라질 지금의 '규화'가, 규화에게는 소중했다.

언젠가는 영인의 그 '규화'가, 그 모음과 자음이 뭉개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이윽고 영인의 규화를, 더는. ... 규화로 알아듣지 못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응."

규화는 대답했다. 그리고 할 것이다.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point 2 줄거리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준우승 후, 피아니스트 문규화는 건초염으로 1년간 안식년을 갖기 전, 서울에서 마지막 리사이틀을 열었다. 기자들의 무례한 질문에 예민해진 규화는 대기실 보안요원에게 짜증을 낸다. 그리고 공연 후 무대 뒤편에서 권교수와 그 보안요원의 대화를 엿 들은 뒤에야, 그가 그토록 찾던 '신정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5년 전 규화가 대상을 받은 콩쿠르에 진정한 우승자는 신정훈이었지만 그는 입상조차 하지 못했다. 규화는 계속 그를 이기는 연주를 해보고 싶었다.

: 하지만, 장영인이 되어 버린 신정훈은 귀와 손에 장애를 가진 조율사가 되어 있었다. 규화는 영인을 개인 조율사로 고용한다. 영인의 마지막 연주는 그 15년 전 콩쿨이었다. 대기번호 16번 문규화, 17번 신정훈, 8살 문규화 연주에 충격받은 11살 신정훈은 악보를 무시한 즉흥곡을 연주하고, 재능 있는 영인을 통해 대리만족하고 입양한 양아버지는 입상조차 하지 못한 영인에게 분노해, 폭행하고 파양했다. 그로 인해 영인은 장애를 얻었지만, 그날을 후회하지 않았다.

: 15년간 서로를 잊지 못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빠르게 빠져든다. 그리고 영인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고, 규화는 거부하지 않는다. 한편, 왜곡된 사랑으로 규화의 세계를 완벽히 통제하는 아버지에 의해, 영인의 존재는 견제 받는다. 결국 아버지의 함정에 빠진 규화는 영인과의 농밀한 대화를 들키고, 규화는 영인의 청력 수술과 치료를 조건으로 미국행을 결정한다. 영인의 옥탑방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규화는 영인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하지만 영인은 거절한다.

: 두 사람은 기약 없는 해후를 언약하며 헤어진다. 영인과의 만남을 통해 피아니스트로 한 층 성장한 규화는 쇼팽 콩쿠르에서 라이벌 바나흐를 누르고 우승한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후 영인을 찾지만, 영인은 수술도 받지 않은 채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3년 뒤, 다시 찾은 서울 화양 아트홀 공연장으로 동선이 전달된다. 건초염이 있는 규화을 위해 영인이 개발한 동선이었다. 규화는 동선의 출처를 찾아간다. 그리고 독일 함부르크 한 공방에서 피아노를 만들고 있는 영인을 만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열심히'를 틀리지 않는다.

퀴어 소설은 호불호가 강하기 때문에 추천이 쉽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퀴어 소설이자 장르소설인 BL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제에겐 참지 못하고 추천하게 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코노하라 나리세 '콜드피버', 달케이크 '꽃감옥', 그리고 숲속의 은호 '피아노시모'가 바로 그 대상들이죠. 이 세 작품은 주인공이 남자들이라는 것보다, 더 깊은 '인간'으로서의 공감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를 틀리지 말자. 제가 늘 선택의 기로에서 확인하고 다짐하는 말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열심히'를 신봉하는 경향이 있어요. YOLO, 워라벨을 외치는 사람들도조차 워크홀릭의 가치를 인정하죠. 무엇이든 열심히만 하면 성공한다는 생각, 그것이 저변에 깔려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열심히'의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때론 연료가 떨어져 바다에 추락하는 비행기처럼, 깊은 미궁의 늪으로 빠지기도 합니다.

'열심히' 사는 법, '열심히' 일하는 법, '열심히' 공부하는 법, 그리고 '열심히' 사랑하는 법... 그 방법들이 틀리면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규화와 영인은 전형적 헌신공, 헌신수예요. 규화의 첫사랑과 끝사랑 모두 영인이었고, 영인의 첫사랑과 끝사랑 모두 규화였습니다. 규화는 수치스러운 대상을 안겨준 진짜 천재 영인에 대한 열등감에 오랫동안 시달렸고, 영인은 피아니스트 삶을 빼앗긴 악몽의 날임에도 그 제멋대로의 연주를 후회하지 않았죠. 16번 문규화가 멋진 연주를 들려준 것처럼, 자신의 마지막 연주 역시 규화가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었어요. 두 사람은 서로에 삶에 이미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건초염으로 강제 휴식기를 가진 피아니스트와 장애를 가진 조율사의 만남은 흔한 이벤트로 지나칠 수 없었죠.

규화와 영인 사이에, 분명 규화의 아버지라는 갈등 요소가 있습니다. 자수성가형 사업가, 다정한 애정보다 전략적 애정을 택한 노련한 통제광이죠. 규화에게 아버지는 두렵지만 벗어난 적 없는 존재였어요. 어머니의 죽음마저도 인간적 공감이 아닌 필요에 의해 선택적으로 숨길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 아버지에게는 영인은 규화에게 불필요한 낭비 이상의 의미가 없었어요. 규화를 감시하고, 영인을 잘라내요. 하지만, 규화는 영인을 포기 한 적 없고, 영인 역시 굴하지 않아요.

규화와 영인이 오랜 시간을 돌아서야 비로소 재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열심히'사랑하는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인은 청각 손실과 손의 장애로 피아노를 칠 수 없어졌어요. 하지만, 피아노를 조율하는 사람이 되어, 그 나름의 '연주'를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규화의 한계는 악보를 읽는다는 것이었고, 그런 규화에게 영인이 알려 준 가르침은 음률을 상상하고 이미지화 시키는 연주였어요. 그러다 규화가 건초염으로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됩니다. 그때부터 영인은 '피아니스트 문규화의 연주'만을 생각해요.

알려 주는 사람도 없고, 대한민국에 동선을 만드는 장인도 없었지만, 영인은 규화에게 맞는 동선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듣는 것'과 '동선을 만드는 것' 중에서 후자를 선택하죠. 영인은 규화에게 거짓말하고, 청력 수술을 받지 않습니다. 소리를 잃더라도, 전자 진동을 삽입해서 예민한 악기 진동을 분별해 낼 수 없는 삶을 거부하죠. 규화가 오랫동안, 아프지 않고,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동선을 만드는 것... 그것이 영인이 규화를 '열심히'사랑하는 법이었으니까요.

규화는 영인의 수술을 담보로 일시적 이별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영인은 수술을 받지 않았고, 규화가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성공한 뒤에도 만날 수 없었죠.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규화는 영인이 만든 동선을 받고 나서야 영인의 거처를 알 수 있었어요. 규화는 영인에게 돌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영인은 3년간 규화를 언제든지 찾을 수 있었음에도, 규화를 외롭게 방치했어요. 규화는 영인에게 원망의 말을 내뱉고, 앞으로 계속 함께 있어달라고 하죠. 이때도 영인은 규화의 곁을 선택하지 않아요. 영인에게는 동선이 아니라, 규화의 '피아노'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생겼거든요.

규화 역시 영인을 그 공방으로부터 데리고 나오지 못합니다. 영인이 선택한 '열심히'의 방법을 응원하는, 사랑법을 선택하죠.

영인은 언제나 규화가 보고 싶었고, 소리를 잃은 대가로 말 역시 잊어 갑니다. 그 순간에도, 영인은 '규화'라는 이름만큼은 잊지 않으려고 연습해요. 내가 듣지 못한 '규화'라도, 마지막까지 들려주고 싶은 소리였으니까요. 하지만, 피아노를 만드는 것으로, 나머지 사랑하는 법을 참아냅니다. 그리고 피아노를 완성해요. 규화는 오로지 피아노를 완성하기 위해 달려온 영인을 걱정합니다. 그런 규화에게 영인은 말합니다. 앞으로는 저 피아노에서 문규화의 연주가 시작할 거라고요. 영인은 피아노를 만들었던 게 아니라, 문규화의 연주를 완성시키려 했던 거였어요.

함께 있어주고, 눈빛을 바라보고, 사랑의 말을 나누는 것이 열심히 사랑하는 법이라면, 영인과 규화는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들일지도 몰라요. 서로를 외롭게 하고, 둘 사이에 피아노를 꼭 넣었으니까요. 하지만, '열심히'의 방법은 누구도 정해 줄 수 없습니다. 롤 모델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내 삶은 누구와도 같을 수 없죠. 분명히, 나만의 '열심히'가 있을 거예요. 그것이 때론 누군가의 방법론과 반대 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나의 '열심히'를 틀리면 안 됩니다.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을 테니까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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