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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20.07.15

분량: 본편 5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생일 축하한다, 명하야."

"네?"

"하순이잖니. 그러니 네 생일이라고 하자."

"오늘을요?"

"오늘을."

명하는 실낱과 사훤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저한테 생일이 있다고요?"

"내가 정해준 거라도 괜찮다면."

"너무 좋아요! 네! 좋아요, 저하!"

좋아서 명하가 사훤을 부르는 호칭이 또 멋대로 바뀌었다. 사훤은 명하가 기뻐하는 것이 가슴이 저미도록 좋았다. 고작 날짜를 정한 것 하나로 좋을까. 그럼 안 되는데. 오늘은 비록 준비가 부족했지만 다음부터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건데.

"다음 달 하순에도 네 생일이 있을 거야."

"생일은 한 번이죠, 저하."

"나한테는 매달 네 생일이 있는데."

시훤이 명하를 감싸 안으려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실로 묶은 손을 단단히 잡았다.

"나는 모든 하순을 좋아할 거다. 모든 하순에 네가 태어난 걸 기억하며 살 거야. 그러면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다시 행복해지겠지. 나는 슬프고 불행할 틈이 없을 거야. 네 덕에."

명하는 주변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던 순간부터 아무도 자신이 태어난 걸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강 진사는 사훤에게 살아있는 살로써 보낼 용도를 떠올리다가 명하의 존재를 기억했다. 죽어야만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그런 명하가, 명하의 태어남이 사훤에게는 불행하지 않을 이유란다. 가슴이 설렁설렁 부풀었다. 연이 되어 하늘 높이 날 수 있을 것 같다.

point 2 줄거리

기: 강 진사의 서자로 태어난 명하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 채 선산 무덤지기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강진사는, 명하에게 아들로 인정해 주겠다며 심부름을 시키고, 동생 청하를 아꼈던 명하는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수락하지만, 곧 우수꽝스러운 여장을 당한 채 사지로 던져졌음을 깨닫는다. 명하는 절망하며 죽음을 각오한다. 그때 나타난 사훤은 명하를 풀어주며 다정하게 대해준다. 명하는 좌의정의 계략으로 대군저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승: 사훤은 좌의정의 살을 맞아 귀문이 반쯤 열렸고, 밤이 되면 광인이 되어 괴행을 일으켰다. 처음이자 유일하게 상량함을 보여준 사훤이었기에, 명하는 사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밤이면 정염에 젓어 명하를 찾는 사훤에게 몸을 내어주었고, 자신이 사훤의 귀문을 완전히 열기 위한 아기살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살을 뒤집어 사훤의 귀문을 대신 받기로 한다. 그렇게, 명하는 죽음을 선택한다.

전: 명하와의 밤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사훤은 순리처럼 명화를 사랑하게 된다. 사훤은 건강해지고, 명하는 병들어갔다. 결국 진실을 안 사훤은 괴로워하지만, 위태로움 속에서도 두 사람의 마음은 깊어만 졌다. 한편, 병약해진 왕은 동생 사훤에게 보위를 부탁하고, 사훤은 왕세제로 책봉된다. 동시에 사훤이 책봉식으로 대군저를 비운 사이, 명하는 좌의정에 모략에 의해 대군저를 나와 붙잡혀 갇히고, 불타는 집에서 강진사를 뿌리친 채 간신히 도망친다.

결: 사훤은 무사히 왕이 된다. 그리고, 명하를 찾지 못한 지옥 같은 시간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었다. 한편,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한 명하는, 마지막으로 사훤을 위해 좌의정과 모반을 공모했다며 스스로를 관에 고발한다. 때마침 사훤의 호위 영욱이 명하를 찾지만, 이미 명하는 삼도천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때, 늙은 산파로 둔갑한 가믄장아기의 도움으로 명하는 아들 이강과 자신의 명줄을 붙잡는다. 살아난 명하는 사훤의 곁붙이가 되어 살아간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내 곁붙이

대부분 동양풍 BL은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세계관은 중국 명청시대를 토대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의 관직명이나 복식, 소품들이 차용되곤 하죠. 간간이 원을 배경으로 할 때도 있지만, 주로 이민족과 맞닿은 변방으로 친정도 가야하고, 제후국과 긴장관계도 필요하다 보니, 아무래도 제약이 많죠. 그래서, 중국 배경의 동양품 BL은 스케일이 큰 대신 디테일이 부족하고, 전형성이 강해 뻔한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그런 이유로, 한국 배경의, 특히나 민속 신앙이나 설화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느는 추세가 매우 신납니다. 알게 모르게 자주 접해 왔고, 싫으나 좋으나 배울 수밖에 없었기에, 확실히 구성이 더 탄탄하고 어색함이 적죠. 소재도 신선하고, 클리셰를 벗어난 전개의 자유도도 높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풍 동양 판타지 BL에서 심심치 않게 명작 타는 냄새를 맞곤 해요. 완결 난 작품으로는 '저승꽃감관,' 미완결 작품으로는 '혼불'이나 '단밤술래' 등등이 있죠.

'열병'도 그중 한 작품입니다. 물론, '열병'이 설정에 몰빵한 작품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열병'의 포인트는 공수의 '애절함'이에요.

명하는 강진사댁 서자로 태어나지만, 명하 생모의 저주로 대과에 합격 못했다는 찌질한 생부로 인해,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합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종인 줄 알았다면 덜 비참하거나 도망치기라고 했을 텐데, 명하에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친애하는 동생 청하가 있었어요. 청하를 보기 위해, 곁에 있기 위해, 멍석말이 당하고, 종놈에서 괄시당하고, 배곯는 외로운 무덤지기로 선산에 버려져도, 꿋꿋이 버텨냅니다.

그날도, 청하에게 줄 다람쥐를 잡아 밥을 구걸하러 강진사 집에 가요. 그런 명하를 불러, 강진사는 문중에 이름을 올려주겠다며 심부름을 시킵니다. 명하는 양반이 되는 것보다 청하의 형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무조건 하겠다고 해요. 하지만, 곧 강진사는 애당초 자신을 아들로 인정해 줄 생각은 없었고, 자신은 죽으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요.

그런 명하에게 사훤은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유일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자신이 추울까, 배고플까 물어주고 챙겨주는 이도, 다정하게 말 걸어주고 웃어주고, 글을 알려주는 이도, 오로지 사훤 하나였죠. 그래서, 명하에게 사훤을 위해 죽고 병드는 것은 전혀 힘든 선택이 아니었어요. 어차피, 가치도 없이 버려진 목숨, 사훤을 위해 쓸 수 있다면, 오히려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기쁜 일이라고 말이에요.

명하가 간과한 것은, 사훤의 마음이었어요. 명하는 자신처럼 하찮은 존재를 고귀한 사훤이 좋아할 리 없다고 단정하죠. 사휜의 애정은 살에 휘말린 일시적인 착각일 거라고 말이에요. 자신의 마음은 거짓 일 수 없는 진심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죽어도 사훤은 왕으로서 반려를 맞아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명하는 너무 쉽게 비밀을 만들고, 도망치고, 죽기로 결심해요. 사훤이, 그저 명하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지, 고통뿐인 생의 시간을 잠시 유예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요.

'열병'은 폐지된 소격서 무당과 도사가 살을 날리고, 인외존재들이 조연으로 등장하며, 명계의 신들이 위기를 반전시켜요. 오메가버스가 아님에도 명하가 임신을 하고, 원자를 낳은 남자 중전을 궁인들과 신료들은 결국 받아들이죠. 저는 조선 초를 떠올리며 읽었는데, 솔직히 세계관을 넘기더라도 감상에 크게 지장은 없습니다. 정쟁이나 갈등이 촘촘하고 밀도 있게 짜여 있다기보다는, 사훤과 명하의 애절한 사랑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거든요.

그래서, 10년을 넘겨 끌어온 좌의정과의 갈등 해결은 의외로 쉽게 풀리고, 임금이 된 후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에요. 사훤의 뜻대로 모두 진행됩니다. 반면에, 생과 사의 경계에서 돌아오는 명하의 여정이나, 사훤과 명하가 함께 있는 일상과 감회에 관해서는 깊이 있고 세밀하게 다루고 있어요. 문맹의 무덤지기는 사랑을 지키는데 단호하고 헌신적이었고, 왕의 자질과 운명을 타고난 대군은 사랑 앞에서 초조하고 위태로웠죠.

사훤의 그림자에 묶여 명하는 살아납니다. 하지만, 선산을 뛰어다니면서도 감기 한 번 안 걸렸던, 건강하고 윤기나던 명하는 더 이상 없어요. 사훤 대신 밤이면 악몽에 시달리고, 수시로 열이 나고 길게 잠들며 수척해졌죠. 그럼에도 두 사람은 분명 행복합니다. 명하는 더 이상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루 종일 비질을 할 순 없지만, 이불에 꽁꽁 쌓여 사훤에게 안긴 채로 눈 구경을 합니다. 다정을 나누고, 짓궃은 농담에 삐지면서도, 결국은 하루도 떨어질 수 없는 내 곁붙이가 되어서 말이에요.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읽었어요. 소조금님의 문체와 내용이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새벽에 읽으려면 각오가 필요해요. 감수성의 바다에, 심해어가 될 수 있습니다.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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