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1 책갈피

 

 

최정은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긍정적이었나 생각했는데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박태서를 만나고부터였고, 긍정적인 건 박태서와 관련된 일뿐이었다. 예를 들어 영상 통화하며 밥을 먹자는 말도 다른 사람에겐 평생 못 할,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말이다.

 

태서는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언제나 이런 사람이 필요했다.

 

내게 관심을 갖고, 걱정을 아끼지 않는 사람.

 

'백태서가 날 길들였어.'

 

불안해야 할까. 이렇게 길들이고 떠나 버리면 전보다 더 크게 외로워질 테니까.

 

하지만 불안하기보다는 홀가분히 미소 지었다. 이 순간만을 즐기고 싶었다. 살면서 별로 느껴 본 적 없는 행복한 시간이니까.

 

 

 

point 2 줄거리

 

 

기: 20살 박태서는 악인 그 자체였다. 마약을 비롯한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하지만, 그는 세계 굴지의 대기업 고성의 막내아들이었고, 수려한 외모를 지녔으며, 부모와 형제들에게 절대적 애정을 받고 있었다. 고로, 그의 악행은 모두 무마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서는 음주운전 후 할머니를 치고, 이에 태서의 부모들은 '힘겹게' 태서의 카드 정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용서문을 받아오지 않으면 카드 정지를 풀어주지 않겠다고 한다.

 

승: 할머니는 자살한 최정의 셋방을 정리해 주면 용서문을 써주겠다고 하고, 태서는 바로 업체를 부른다. 작고 낡은 방엔 최정의 유서와 소소한 그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문득 호기심이 든 태서는 최정의 pc를 가져오고, 최정이 요리 레시피 카페에 올린 게시글을 보게 된다. 그렇게 알게 된 최정은 태서와 동갑인 고아였고, 제대로 배우지 못해 맞춤법도 다 틀리며, 바보같이 사기나 당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차고 성실하며, 수다스럽고 사랑스러웠다.

 

전: 태서는 재력을 쏟아부어 최정을 찾지만, 속초를 마지막으로 그의 자취는 끊겨 버렸다. 하지만, 태서는 최정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그가 기뻐할 만한 것들을 준비하고, 부끄럽지 않도록 좋은 사람이 되려 한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런 태서의 변화를 반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최정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고, 태서는 나날이 최정을 그리며 우울증에 빠진다. 그렇게 먹지 못하고, 슬픔에 침식돼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실종 5년, 최정은 법적으로 죽은 사람이 된다.

 

결: 태서는 최정을 따라 죽기 위해, 속초 바다로 뛰어든다. 그 순간 태서는 기적을 만난다. 최정이 태서를 구한 것이다. 최정은 그동안 속초에서, 자신을 구해준 부부에게 갈취당하는 줄도 모른 채 착취 당하며 살고 있었다. 언뜻 행복해 보이나, 최정은 여전히 외로웠다. 그러다 은인의 추한 민낯을 보게 된 최정은, 태서와 함께 서울로 온다. 그곳엔 태서가 공들여 만든, 최정만을 위한 세상이 있었다. 물론, 잠시의 위기는 있었으나, 두 사람은 결국 완벽한 행복을 찾는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악인에게 가장 행복한 세상, 선인에게 가장 불행한 세상

 

 

미지의 절대자가 세상을 운영할 때, 좋은 사람에게 좋은 삶을, 못된 사람에게 나쁜 삶을 매칭 시켜 주면 좋을 텐데... 그전에 절대자가 선의를 가진 합리적 존재라면, '못된 사람'과 '나쁜 삶' 자체가 없겠죠. 인간이 괴로운 건 인간 탓이라고 발 빼서 그런가요. 뭐.. 어쨌든, 저는 원죄도 기적도 운명도 천국도 윤회도 믿지 않습니다. 그저, 이 세상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 좌충우돌 굴러가고 있을 뿐... 그리하야, 세상은 요지경이죠.

 

'만약 널 만난다면'의 세상도 요지경입니다. 악인은 행복하고, 선인은 불행하죠. 모든 걸 가진 악인은, 살면 살수록 더 가지고, 빈손으로 태어난 선인은, 살면 살수록 간신히 가진 그 '조금'조차 가차 없이 빼앗깁니다. 악인은 사람을 이용하고, 선인은 사람에게 이용당해요. 그러다 요지경의 요지경이 발생합니다. 바로 그 악인이 본 적도 없는 그 선인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어요.

 

태서의 세상은 완벽합니다. 넘치는 돈, 자신과 닮은 친구들, 천사 부모님과 다툼 없는 형제들, 거기다 조각 같은 외모까지! 넘치는 돈은 태서에게 편하고 호의적인 세상을 주었고, 자신과 닮은 친구들 때문에 막 나가는 삶을 살아도 태서는 외롭지 않았어요. 부모님은 넘치는 애정으로 태서가 친 사고를 모두 수습해 주었고, 막내가 귀엽기만 한 형제들은 뭘 해도 우쭈쭈였어요. 대가는 없고, 무한한 혜택만 있는 삶인 셈이죠.

 

반대로 최정의 세상은 무한 대가를 치름에도, 혜택은 전혀 없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어요. 고아인 최정은 시설에서 나오자마자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 밤낮없이 일합니다. 학교도 못 다니고, 놀러 다닐 시간도 없는 최정은 언제나 혼자였어요. 그리고, 그나마 그렇게 일해 번 돈조차, 믿었던 형에게 배신 당해 뺏기죠. 최정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나이지는 건 없었어요. 그런 최정의 유일한 위안처는 요리 레시피 카페였죠.

 

하지만, 그 조차 녹녹하진 않았어요. 처음에 카페 회원들은 수다스럽게 일상을 올리는 최정을 귀여워합니다. 엄마는 왜 입양이 안되냐는 글에 위로해 주고, 추위에 떨면서도 성실하게 돈 버는 모습을 기특해하며, 때때로 기프트콘도 보내 줍니다. 그러나 분위기는 서서히 변합니다. 맞춤법을 고의로 틀리는 관종이다, 괜히 카페 분위기 어둡게 무거운 이야기만 쓴다면서, 점점 최정의 글에 늘어가는 죽음의 메시지를 알아채지 못하죠. 결국, 최정은 그 유일한 동아줄마저 놓아버립니다.

 

최정이 삶을 포기하고 난 뒤, 우연히 태서는 최정의 그 글들을 보게 돼요. 그리고 태서는 최정이 입고 싶었던 롱패딩, 먹고 놀랐던 마카롱, 부럽기만 했던 벌꿀 인형, 그런 하찮은 것들조차 가지지 못한 최정을 안타까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태서의 일상 속에 최정은 서서히 물들어 갑니다. 태서는 자주 최정을 떠올렸고, 최정이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됐어요. 최정의 유서를 보고, 그의 방을 정리까지 했지만, 태서는 어느덧 가상의 최정과 함께 살고 있었죠.

 

뒤틀리기 시작한 태서의 일상은 호재처럼 보였어요. 태서는 최정이 그토록 원하지만 가지지 못한 가족과 친구들에게 친절해집니다. 최정이 자신을 형편없게 보는 것이 두려워, 과거의 잘못을 만회하려고 노력하죠. 그래서 소망 재단 이사가 되어 선행을 베풀며, 사고도 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최정이 없다는 거였어요. 비록 시체가 없어 실종 상태였지만, 넘치는 재력을 쏟아부어도 도저히 최정은 찾을 수 없었고, 끝내 법원마저 최정의 사망을 선고합니다.

 

태서는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최정의 콜센터 통화 파일을 구해 AI 음성도 만들고, 최정과의 합성 사진은 물론 DNA 모형까지 제작해요. 그렇게나마 최정의 존재를 메꾸려고요. 어쩌면 최정이 인어가 되었거나 아틀란타스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며, 사후세계와 오컬트에 관한 책들도 읽죠. 더불어 우울증 치료도 꾸준히 받아요. 하지만, 최정이라는 구멍은 태서의 마음속에서 커지기만 합니다. 태서는 외로워졌고, 그 외로움은 죽음으로 이르는 병이었어요. 최정이 그러했듯 말이죠.

 

최정의 죽음 후 태서의 사랑은 시작됐듯, 태서의 죽음 후 최정의 행복은 발동을 겁니다. 태서는 자살하러 간 속초에서 살아있는 최정을 만나요. 그리고 태서를 비롯한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최정을 포획(?)하기 위한 필사의 전략을 펼칩니다. 처음 태서는 최정이 행복해졌다고 생각하고, 함께 속초에 살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참으로 가관이었죠. 최정은 여전히 잘 먹지 못했어요. 휴일은 한 달에 단 하루뿐이었고, 비정상적 저임금에, 그나마 그 돈조차 오롯이 최정의 것이 아니었어요. 무수한 무임 노동에 머슴처럼 부려지기도 했고요.

 

서울이 최정을 외롭게 만든 사람들의 도시였다면, 속초는 최정의 외로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죠. 최정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어찌 보면 '기만' 당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나빠졌죠. 태서는 최악의 끝에서 다시 최악으로 빠진 최정을 구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최정에게 가장 완벽하게 준비된 행복을 주려해요. 최정이 가장 행복한 세상이, 태서에게도 가장 완벽한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진실로, 그 세상은 '완벽'했어요.

 

소림님 작품이 늘 그러하듯, '만약 널 만난다면' 역시 엉뚱 발랄 캐릭터와 유쾌한 서사, 통통 튀는 사건들로 웃으며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묵직하게 가슴 한편을 누르는 '현실 비틀어보기'도 있습니다. 다만, 최정이 태서의 오랜 스토킹에 대해서 알게 되는 부분이, 다소 잉?스럽게 마무리되어 허무했어요. <완결>를 보고 냉수 먹고 띵한 기분이었죠. 그리고, 외전에서 태서에게 완전히 정착한 최정의 일상은 므흣했지만, 결혼까지 가지 못한 점은 아쉬웠어요.

 

북적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위로가 늘 외로움을 덜어주는 것은 아닌 듯해요. 얼마나 '나'를 알고 싶어 하는가? 이해하려고 하는가? 이것을 가능케 하는 진실로 순수한 '관심'... 그것이 그토록 어렵고 희귀해 사람은 외롭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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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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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모드

출간일: 2020.07.15

분량: 본편 5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생일 축하한다, 명하야."

"네?"

"하순이잖니. 그러니 네 생일이라고 하자."

"오늘을요?"

"오늘을."

명하는 실낱과 사훤을 번갈아 보다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저한테 생일이 있다고요?"

"내가 정해준 거라도 괜찮다면."

"너무 좋아요! 네! 좋아요, 저하!"

좋아서 명하가 사훤을 부르는 호칭이 또 멋대로 바뀌었다. 사훤은 명하가 기뻐하는 것이 가슴이 저미도록 좋았다. 고작 날짜를 정한 것 하나로 좋을까. 그럼 안 되는데. 오늘은 비록 준비가 부족했지만 다음부터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건데.

"다음 달 하순에도 네 생일이 있을 거야."

"생일은 한 번이죠, 저하."

"나한테는 매달 네 생일이 있는데."

시훤이 명하를 감싸 안으려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실로 묶은 손을 단단히 잡았다.

"나는 모든 하순을 좋아할 거다. 모든 하순에 네가 태어난 걸 기억하며 살 거야. 그러면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다시 행복해지겠지. 나는 슬프고 불행할 틈이 없을 거야. 네 덕에."

명하는 주변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던 순간부터 아무도 자신이 태어난 걸 기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강 진사는 사훤에게 살아있는 살로써 보낼 용도를 떠올리다가 명하의 존재를 기억했다. 죽어야만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그런 명하가, 명하의 태어남이 사훤에게는 불행하지 않을 이유란다. 가슴이 설렁설렁 부풀었다. 연이 되어 하늘 높이 날 수 있을 것 같다.

point 2 줄거리

기: 강 진사의 서자로 태어난 명하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 채 선산 무덤지기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강진사는, 명하에게 아들로 인정해 주겠다며 심부름을 시키고, 동생 청하를 아꼈던 명하는 가족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수락하지만, 곧 우수꽝스러운 여장을 당한 채 사지로 던져졌음을 깨닫는다. 명하는 절망하며 죽음을 각오한다. 그때 나타난 사훤은 명하를 풀어주며 다정하게 대해준다. 명하는 좌의정의 계략으로 대군저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승: 사훤은 좌의정의 살을 맞아 귀문이 반쯤 열렸고, 밤이 되면 광인이 되어 괴행을 일으켰다. 처음이자 유일하게 상량함을 보여준 사훤이었기에, 명하는 사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밤이면 정염에 젓어 명하를 찾는 사훤에게 몸을 내어주었고, 자신이 사훤의 귀문을 완전히 열기 위한 아기살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살을 뒤집어 사훤의 귀문을 대신 받기로 한다. 그렇게, 명하는 죽음을 선택한다.

전: 명하와의 밤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사훤은 순리처럼 명화를 사랑하게 된다. 사훤은 건강해지고, 명하는 병들어갔다. 결국 진실을 안 사훤은 괴로워하지만, 위태로움 속에서도 두 사람의 마음은 깊어만 졌다. 한편, 병약해진 왕은 동생 사훤에게 보위를 부탁하고, 사훤은 왕세제로 책봉된다. 동시에 사훤이 책봉식으로 대군저를 비운 사이, 명하는 좌의정에 모략에 의해 대군저를 나와 붙잡혀 갇히고, 불타는 집에서 강진사를 뿌리친 채 간신히 도망친다.

결: 사훤은 무사히 왕이 된다. 그리고, 명하를 찾지 못한 지옥 같은 시간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었다. 한편,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한 명하는, 마지막으로 사훤을 위해 좌의정과 모반을 공모했다며 스스로를 관에 고발한다. 때마침 사훤의 호위 영욱이 명하를 찾지만, 이미 명하는 삼도천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때, 늙은 산파로 둔갑한 가믄장아기의 도움으로 명하는 아들 이강과 자신의 명줄을 붙잡는다. 살아난 명하는 사훤의 곁붙이가 되어 살아간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내 곁붙이

대부분 동양풍 BL은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세계관은 중국 명청시대를 토대로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때의 관직명이나 복식, 소품들이 차용되곤 하죠. 간간이 원을 배경으로 할 때도 있지만, 주로 이민족과 맞닿은 변방으로 친정도 가야하고, 제후국과 긴장관계도 필요하다 보니, 아무래도 제약이 많죠. 그래서, 중국 배경의 동양품 BL은 스케일이 큰 대신 디테일이 부족하고, 전형성이 강해 뻔한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그런 이유로, 한국 배경의, 특히나 민속 신앙이나 설화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느는 추세가 매우 신납니다. 알게 모르게 자주 접해 왔고, 싫으나 좋으나 배울 수밖에 없었기에, 확실히 구성이 더 탄탄하고 어색함이 적죠. 소재도 신선하고, 클리셰를 벗어난 전개의 자유도도 높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풍 동양 판타지 BL에서 심심치 않게 명작 타는 냄새를 맞곤 해요. 완결 난 작품으로는 '저승꽃감관,' 미완결 작품으로는 '혼불'이나 '단밤술래' 등등이 있죠.

'열병'도 그중 한 작품입니다. 물론, '열병'이 설정에 몰빵한 작품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열병'의 포인트는 공수의 '애절함'이에요.

명하는 강진사댁 서자로 태어나지만, 명하 생모의 저주로 대과에 합격 못했다는 찌질한 생부로 인해,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합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종인 줄 알았다면 덜 비참하거나 도망치기라고 했을 텐데, 명하에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친애하는 동생 청하가 있었어요. 청하를 보기 위해, 곁에 있기 위해, 멍석말이 당하고, 종놈에서 괄시당하고, 배곯는 외로운 무덤지기로 선산에 버려져도, 꿋꿋이 버텨냅니다.

그날도, 청하에게 줄 다람쥐를 잡아 밥을 구걸하러 강진사 집에 가요. 그런 명하를 불러, 강진사는 문중에 이름을 올려주겠다며 심부름을 시킵니다. 명하는 양반이 되는 것보다 청하의 형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무조건 하겠다고 해요. 하지만, 곧 강진사는 애당초 자신을 아들로 인정해 줄 생각은 없었고, 자신은 죽으러 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요.

그런 명하에게 사훤은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유일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자신이 추울까, 배고플까 물어주고 챙겨주는 이도, 다정하게 말 걸어주고 웃어주고, 글을 알려주는 이도, 오로지 사훤 하나였죠. 그래서, 명하에게 사훤을 위해 죽고 병드는 것은 전혀 힘든 선택이 아니었어요. 어차피, 가치도 없이 버려진 목숨, 사훤을 위해 쓸 수 있다면, 오히려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면, 기쁜 일이라고 말이에요.

명하가 간과한 것은, 사훤의 마음이었어요. 명하는 자신처럼 하찮은 존재를 고귀한 사훤이 좋아할 리 없다고 단정하죠. 사휜의 애정은 살에 휘말린 일시적인 착각일 거라고 말이에요. 자신의 마음은 거짓 일 수 없는 진심이라고 믿으면서, 자신이 죽어도 사훤은 왕으로서 반려를 맞아 행복하게 살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명하는 너무 쉽게 비밀을 만들고, 도망치고, 죽기로 결심해요. 사훤이, 그저 명하의 생사를 확인할 때까지, 고통뿐인 생의 시간을 잠시 유예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요.

'열병'은 폐지된 소격서 무당과 도사가 살을 날리고, 인외존재들이 조연으로 등장하며, 명계의 신들이 위기를 반전시켜요. 오메가버스가 아님에도 명하가 임신을 하고, 원자를 낳은 남자 중전을 궁인들과 신료들은 결국 받아들이죠. 저는 조선 초를 떠올리며 읽었는데, 솔직히 세계관을 넘기더라도 감상에 크게 지장은 없습니다. 정쟁이나 갈등이 촘촘하고 밀도 있게 짜여 있다기보다는, 사훤과 명하의 애절한 사랑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거든요.

그래서, 10년을 넘겨 끌어온 좌의정과의 갈등 해결은 의외로 쉽게 풀리고, 임금이 된 후에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에요. 사훤의 뜻대로 모두 진행됩니다. 반면에, 생과 사의 경계에서 돌아오는 명하의 여정이나, 사훤과 명하가 함께 있는 일상과 감회에 관해서는 깊이 있고 세밀하게 다루고 있어요. 문맹의 무덤지기는 사랑을 지키는데 단호하고 헌신적이었고, 왕의 자질과 운명을 타고난 대군은 사랑 앞에서 초조하고 위태로웠죠.

사훤의 그림자에 묶여 명하는 살아납니다. 하지만, 선산을 뛰어다니면서도 감기 한 번 안 걸렸던, 건강하고 윤기나던 명하는 더 이상 없어요. 사훤 대신 밤이면 악몽에 시달리고, 수시로 열이 나고 길게 잠들며 수척해졌죠. 그럼에도 두 사람은 분명 행복합니다. 명하는 더 이상 내리는 눈을 맞으며 하루 종일 비질을 할 순 없지만, 이불에 꽁꽁 쌓여 사훤에게 안긴 채로 눈 구경을 합니다. 다정을 나누고, 짓궃은 농담에 삐지면서도, 결국은 하루도 떨어질 수 없는 내 곁붙이가 되어서 말이에요.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읽었어요. 소조금님의 문체와 내용이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새벽에 읽으려면 각오가 필요해요. 감수성의 바다에, 심해어가 될 수 있습니다.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

출판사: W-Beast

출간일: 2021.04.26

분량: 본편 1권

 

point 1 책갈피

"신경 쓰여?"

이런 내 모습이 좋아 죽겠다는 듯이 얄밉게도 웃는다.

"막, 나 보면 당황하고 긴장되고 평소랑 달라서 죽겠고, 티 내면 쪽팔리니까 숨기고 싶은데, 그럴수록 더 부자연스럽고 그렇지?"

술술 쏟어지는 그의 정답 퍼레이드에 반쯤 포기했다.

"넌 왜 그렇게 잘 알아?"

"다 겪었던 거니까."

새삼 나를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게 와닿았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친구로 그의 곁에 붙어 있는 동안, 정수범은 무슨 생각으로 고통을 참아낸 걸까.

"뭐, 나도 포기해보려 했고, 너랑 똑같은 온도로 대하려고 죽어라 노력해 봤는데."

스윽.

손을 뻗어 내 볼을 잡는다. 정수범의 손가락은 차가웠다. 아니면 내 볼이 비정상적으로 뜨겁거나.

"안 되겠더라고. 아무리 해도 안 돼. 안되는 걸 매달려도 소용없어. 그래서 결심했지. 나 혼자서는 끝낼 수 없으니까 어디 끝까지 가보겠다고."

볼에 닿은 손이 내려와 테이블 밑에 있던 내 손을 꽉 잡았다.

"너도 끝까지 가. 가보고 나서 안 되겠으면 말해. 근데."

그 꽉 잡은 손가락이 깍지를 얽으면서 빈틈없이 맞물렸다. 정수범은 깍지를 낀 손을 들어 올렸다.

"너한테 도망칠 구멍 주는 그런 어설픈 새끼 아니다, 나는."

쪽.

맞잡은 내 손등 면에 입을 맞춘다.

point 2 줄거리

기: 모범생 이차준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알친구가 있다. 어머니들 배 속에서부터 이미 소꿉친구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정수범은 초중고 내내 이차준의 그림자였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거절당한 이유도 모두 정수범이었다. 이차준은 공부머리라곤 조금도 없는 정수범이 절대 올 수 없는 명문대로 도피하려 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정수범은 체육 특기생으로 먼저 그 학교에 수시 합격한다. 이런 이차준과 정수범의 관계는 수능 직후 급변을 겪는데...

승: 정수범은 야동을 본 적 없는 이차준을 집으로 불러 야동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가슴을 만지기 시작한다. 놀란 이차준은 그날 이후 정수범을 피하지만, 오히려 정수범은 태연하게 굴며 차준의 집으로 와 강의를 핑계로 더 대담한 짓거리를 한다. 차준은 그날 이후 면접을 핑계로 정수범을 또 피한다. 하지만, 이미 부모가 절친인 관계! 둘은 안 만날 수 없었다. 결국, 차준은 얼떨결에 12월 31일 수범과 약속을 잡고 만다.

전: 차준은 꾀병으로 약속을 피해보려 하지만 실패하고, 수범이 알바해서 사 준 명품 옷을 입고, 수범과 맛집에서 식사 한 후, 수범이 예약한 호텔에서 술을 마신다. 수범은 차준에게 고백하고, 차준은 술에 취해 수범에게 2번째 강의를 해달라고 유혹한다. 두 사람은 뜨밤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며 연인이 된다. 차준마저 대학에 합격하면서 두 사람의 동거는 시작된다. 바야흐로, 열혈 CC의 탄생이 되시겠다.

결: 차준은 공부 이외에 뭐든 잘하는, 잘생기고 몸 좋고 인기 있는 수범을 보며 불안해 한다. 동시에 차준은 수범과의 섹스에 빠져들며, 점점 수범에 대한 애정도 깊어져갔다. 반면, 수범은 어려서부터 차준과 결혼하기로 결심했고, 중간중간 시련과 혼란은 있었지만, 차준을 가지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획하고 노력해왔다. 고로, 이미 차준과의 미래 설계까지 끝내 놓은 수범에게 그런 차준의 걱정은 그저 불 쏘시게 일 뿐! 두 사람은 염병첨병 연애를 계속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맑고 밝고 유쾌한

'달콤하게 적셔줄게'는 망태기님의 기존 작품에서 연상되는 하드코어, 고수위, 다공일수와 결이 다른 작품입니다. 또, 기존작들 역시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 애정보다는 몸정이, 짝사랑과 일편단심이라는 소재에서도 욕망 우선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양상이 다릅니다. 그래서, 망태기님의 '시그니처'를 기대한 독자라면,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망태기님 특유에 색스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수범은 수능이 끝남과 동시에, 차준과 친구 이상의 관계를 시도합니다. 백지와 같은 순수 영혼인 차준이 도망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대학 입학 전까지 승부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죠. 풋풋과 상큼 발랄의 대명사 학원물에서, 이런 경우 아가들은 입맞춤을 하지만... 망태기님은 가슴을 먼저 길들입니다.

또, 모럴리스한 강수는 없지만, 몸정으로 신세계를 연 유혹수는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수범은 호텔을 예약하고 차준에게 섹스하겠다며 엄포도 놓지만, 쉽게 건드리지 못해요. 차일 수도 있다고, 싫으면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 마음으로 문신도 하고, 실제로 그렇게 말도 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관계를 진전 시킨 건 차준이었어요. 차준은 수범이 준 쾌락을 떠올렸고, 수범이 아닌 사람과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았죠. 결국, 수범뿐이라는 결론에 이른 차준은 오히려 멈짓하는 수범을 유혹합니다.

이후로도, 수범은 매일 아침 차준의 이불 속에 들어가 차준의 가슴에 집착하면서도, 과제도 시험도 많은 차준을 걱정하고 배려합니다. 애달프고 끼를 부리는 건 또 차준! 수범은 확실한 계략공이지만, 결국 질투든 섹스든 둘 사이에 트리거를 당기는 건 쾌락에 약한 수인셈이죠. 그런 면에서 망태기님 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체적으로 기존의 작품들이 퇴폐적 분위기가 강했다면, '달콤하게 적셔줄게'는 맑고 밝고 유쾌해요. 짝사랑, 첫사랑, 첫 연애, CC 커플에서 연상 가능한, 의욕과 체력과 호기심이 넘치는 소꿉친구의 연애담입니다. 정상적이고, 일반적이고, 오히려 서로가 너무 잘난 애인이랑 둬서 불안하고, 서로를 추켜세워주기 바쁜 귀여운 커플들이죠. 수시점의 서사가 재치 있고, 공이 입버릇처럼 욕은 하지만 의외로 더티 토크는 많지 않습니다.

학점, 군대, 취업, 결혼...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계획하는 모습이 매우 상식적입니다. 웃으며 므흣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지만... 글쎄요... 이 남모를 아쉬움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장난감에 호기심을 느끼고, 잘난 서로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는 장면에서, 고 아슬아슬한 선을 넘어 집착광공과 방만한 유혹수가 되길 예상했기 때문이겠죠. 끝까지 맑고 밝고 유쾌한 커플들에게, 못난 어른이라 미안해요.

※ 동일 작가의 다른 소설 리뷰

 

2021.01.10 - [BL 소설] - [현대물/하드코어물] 욕망형제 - 망태기

 

[현대물/하드코어물] 욕망형제 - 망태기

출판사: W-Beast 출간일: 2019.10.03 분량: 본편 1권 ​ ​ ​ ​ point 1 책갈피 ​ ​ "형, 섹스 원래 좋아했어?" ​ 술을 아예 병째로 챙긴 규빈이 2층 계단으로 향했다. ​ "응" ​ "왜?" ​ "기분 좋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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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 [BL 소설] - [연예계물/하드코어물/달달물] 불공정 거래 - 망태기

 

[연예계물/하드코어물/달달물] 불공정 거래 - 망태기

출판사: 체셔 출간일: 2019.03.05 분량: 본편 1권 + 외전1권 ​ ​ ​ ​ ​ point 1 책갈피 ​ ​ "거래에 공정한 게 어디 있어요. 결국은 어느 한쪽이 이득을 보고 손해를 보기 마련인데요. 플러스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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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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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블릿

출간일: 2021.04.06

분량: 본편 2권

point 1 책갈피

"도후 님은, 가끔 절 이렇게 무는데. 그럼 안 돼요."

금왕자가 하얀 발끝으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늘어놓는 투덜거림에 도후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래도 화가 난 표정은 아니었다. 그것과 미묘하게 다른, 무언가에 뒤통수를 쾅 얻어맞기라도 한 듯 가벼운 충격을 머금은 그런 표정이었다. 그래서 도후는 방금 자신이 물려고 한 게 아니라 가벼운 입맞춤을 하려고 했다는 반박 같은 건 떠올릴 수가 없었다. 다만, 한가지만이 떠올랐다.

"싫어?"

혹시라도 품에 안긴 이 작은 생물이 자신을 거북하게 생각할까 봐, 도후는 그 순간 태어나 처음으로 불안을 느꼈다. 하지만 다행히 금왕자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어 주었다.

"아니요, 아니요. 싫은 게 아니라...... 도후 님이 그러고 나면 너무 심장이 두근거리거든요. 막, 쿵쾅쿵쾅 정신이 없어질 만큼 뛰어대요.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요."

술에 취한 탓인지 평소보다 더 솔직한 금왕자의 심경 토로에 도후의 눈에서 충격의 빛이 한 겹 걷혔다. 대신 미묘한 기쁨이 차올랐다. 이 작은 생물이 자신으로 인해 심장이 다급해진다는 사실이 어쩐지 무척 유쾌하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물면 안 돼요?"

금왕자가 자신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엄하게 덧붙이는 말에 도후는 다시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그건 어려워."

"왜요?"

도후의 단호한 대꾸에 금왕자는 반쯤 감았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힘드니까."

"힘들어요?"

금왕자가 반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널 보고 있으면, 가끔. 너무 배가 고파 견딜 수 없게 돼."

point 2 줄거리

기: 금왕인 아버지와 인간이 어머니를 둔 금왕자 수호! 금슬이 너무 좋은 부모님을 보며 자신도 인간 반려를 찾겠다는 강한 의지로, 호랑이, 독수리 보좌관과 함께 인간계로 내려왔다. 어머니처럼 동물을 좋아하는 반려를 찾기 위해 그들은 동물원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수호는 금왕과 같은 위압감을 내뿜는 검은 인간 백도후를 만난다. 그리고 심한 인간 혐오를 가지고 있었던, 도살자 백도후는 투명하고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호에게 관심을 갖는다.

: 이후 금왕자 일행은 피 냄새가 진동한 살인 현장에서 백도후와 재회하고, 백도후의 집에 가게 된다. 도후는 반려를 찾는 금왕자의 사정을 듣고, 반려를 찾는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 것을 허락한다. 시크하지만 금왕자를 아끼는 츤데레 독수리와 금왕자 덕후 호랑이 호야, 순수하고 맑고 착하고 애교 많고 귀여운 금왕자와의 생활이 이어지면서, 도후는 수호에게 애정어린 소유욕을 느낀다. 한편, 도후는 이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산속 별장으로 이사한다.

전: 첫 만남부터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던 도후와 함께 하면서 수호는 반려 찾는 일을 멈춘다. 반면, 도후와 수호의 관계가 가까워지자, 질투가 난 호랑이 호야는 수호의 반려를 찾아 빨리 인간계를 떠나려고 한다. 수호의 또 다른 덕후 사자 사야가 찾아오면서, 호야와 사야는 적극적으로 반려 찾기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존재는, 도후가 속한 조직의 반대파 '서본'에 노출된다. 설상가상 호야와 사야의 바보짓이 더해지면서, 도후가 직접 나서기에 이른다.

결: 도후는 수호의 반려가 '남자'여도 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 스스로 반려가 되겠다고 생각했고 이를 수호에게 말한다. 수호는 기꺼이 허락한다. 하지만, 서본의 행동대장 민머리가 산속 별장에 쳐들어 오고, 이 과정에서 수호가 독이 묻은 칼에 찔리면서 위기에 빠진다. 결국, 수호의 해독을 위해 염왕은 내려오고, 도후를 본 염왕은 그가 '금신의 조각을 타고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도후와 수호는 영원을 함께 할, 서로의 반려가 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어떻게... 아기 호랭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귀욤사 주의!)

모든 동물의 새끼는 귀엽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품에 꼬옥~들어오는 아기 호랭이가 있어요. 호수처럼 투명한 파란 눈과 온몬을 덮는 푸른빛 검은 털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 검은 바탕 위에는 금줄이 수 놓아져 있지요. 하지만, 역시 최고의 매력 포인트는, 양발을 신은 것 같은 하얀 네 발과 핑크빛 코예요. 특히, 하얀 발바닥 젤리는, 인간 도살자도 조물 조물, 문질 문질, 쪽쪽 발발하게 만드는 마약 같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죠.

그냥, 있기만 해도 이런데... 이 아기 호랭이가 어른 호랑이 목 깃털에 부비부비 하면! 미간 사이를 하얀 발로 꾹꾹이 하면! 촉촉한 콧방울로 콕콕 대면! 작은 얼굴로 갸윳갸윳하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어요? 정말, 귀욤사 대비가 필요한 소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작 '금수의 왕'이 맹수덕후인 호연이 초원, 설원, 사막, 하늘을 넘나들며 각종 금수들을 조물딱거리는 전방위적 덕통사였다면, '금수의 왕자'는 인간계에 내려온 아기호랭이에 제대로 꼬인 인간 도살자의 직진 귀욤사라도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둘 다 좋아 죽는다는 거죠!

'금수의 왕'에는 많은 동물들이 짧게 등장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나열식 전개라 텐션이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호연의 성덕기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금왕과 호연의 애정사는 다소 '깝툭튀'라는 인상을 받았었고, 가족과 친구가 있는 정상적 일반인 호연이 너무 쉽게 인간계를 버린다는 설정이 잉?스러웠어요. '사랑은 위대하다.'라는 것으로 덮기에는, 고모와의 관계가 좋아 보였거든요.

그런 면에서, '금수의 왕자'는 확실한 진화형입니다! 일단, 호수의 반려 찾기라는 메인이벤트로 모든 에피소드가 집중되기 때문에, 몰입도가 있습니다. 또, 등장 동물의 수는 줄었지만, 그 대신 호수라는 매력적 캐릭터가 일당백 합니다.

무엇보다, 도후가 1000년에 한 번, 그중 희박한 확률로 금신의 조각을 타고난 인간이라는 설정이 좋았어요. 그래서 도후는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고, 인간을 혐오하며 인간 도살자가 되어, 순수하고 맑은 동물들로만 힐링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거죠. 물론, 수호는 그 자체로도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수호를 동물원에서 만났고, 수호라는 '인간'이 신기해 관심을 가졌고, 사랑에 빠져 운명을 성취해 낸 스토리들이, 잘 맞물려져 있다고 느꼈어요.

다만, '금수의 왕'이 19세인 반면, '금수의 왕자'는 15세예요. 그래서 수호를 잡아먹고 싶지만, 참아야만 하는 인간 도후는 꽃을 먹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영화 황해의 하정우가 떠올랐더랬지요. 정말 김처럼 꽃을 우걱우걱 먹으며, 욕망 역시 씹어 삼켜야 했던 도후에게 삼삼한 애도를 표했습니다. 물론, 적극적 씬은 나오지 않지만, 수호는 못 느끼고 독자는 매우 느끼는, 도후의 '활활활'이 있기 때문에 동화틱하지만은 않습니다. 차라리, 마지막에 씬 하나 몰빵하고, 19세 구색을 맞춘 것 같은 '금수의 왕'에 비해, 훨씬 완성도가 높아 보여 나쁘지 않았어요.

산속 별장에 남겨진 수호와 도후가 산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작은 동물들이 금왕자를 반기며 지저귀고, 신이 난 금왕자는 폴짝이며 수다스러워져요. 의뭉스러운 인간이 아닌, 순수한 호의적 금수 사이에서 도후의 감정은 해방됩니다. 그런 도후의 눈에는 빛나는 신성한 생명체가 숲속을 걷고 있었고, 그때 든 격정적 감정은 낯설지만 분명한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었죠. 피톤치드를 온몸으로 받으며 힐링하는 기분으로 읽었던 것 같아요. 유독 기억에 남는 씬이었어요.

금수의 세계에 많은 커플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금왕과 호연 커플도, 금왕자와 도후 커플도 더더더 많이 보고 싶긴 합니다. 호연이 쌍둥이들을 출산했으니, 그들의 우당탕탕 육아기가 나올 수도 있지만... 예측컨대 다음 연작은 설왕 커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목은 '설원의 왕'!!!! 예... 저의 희망사항이었습니다. 어쨌든, 더욱 진화된 금수 시리즈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이루어졌으면 좋겠네요.

※ 동일 작가의 다른 소설 리뷰

 

2021.03.01 - [BL 소설] - [인외존재/힐링물/잔잔물] 금수의 왕 - 몽낙

 

[인외존재/힐링물/잔잔물] 금수의 왕 - 몽낙

출판사: 에피루스 출간일: 2021.01.07 분량: 본편 2권 ​ ​ ​ ​ ​ point 1 책갈피 ​ ​ "예전에 어디선가 들은 우스갯소리인데요. 어떤 사람이 호랑이를 두고, 이 녀석이 내 고양이 라면 얼마나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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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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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민트BL

출간일: 2021.04.02

분량: 본편 2권

point 1 책갈피

"퇴원은 그렇다 쳐도, 침대에서도 못 내려올 만큼 아픈 곳은 하나도 없다니까요."

"절대로 안 돼. 너, 내 말 잘 듣겠다며. 맛있는 거로 잘 골라 올 테니까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할 수 있지?"

"...와. 형, 진짜 치사하...아니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하하. 제가 설마 하늘 같은 형님께 치사하단 말을 했겠어요? 후. 알겠어요. 형 말대로 얌전하게 침대에 누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얼른 다녀와요."

민서는 부루퉁한 얼굴로 보란 듯이 죄 없는 이불만 끌어다 주물럭거리며 무언의 시위를 했다. 승원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서가 황급히 승원의 팔을 잡았다.

"한 번만 더 해줘요. 아니, 두 번만 더 해 주세요. 이마에만 하지 말고 입술에도 해 주세요."

"착하게 있으면 갔다 와서 해 줄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형이요."

point 2 줄거리

기: 승원은 오토바이 사고로 두 팔이 마비되는 장애를 얻는다. 명문대를 다니는, 성실하고 착한 아들의 비극에 부모님은 슬퍼하지만, 기초 생활 수급자로 생활하는 가난한 살림에 승원의 큰 수술비를 댈 수 없었다. 수술을 포기한 승원은 어머니의 수발을 받으며, 절망 역시 마주해야 했다. 결국, 승원은 중증 장애인 시설로 도망치듯 입소하고, 그곳에서 자원봉사를 나온 민서를 만난다. 그리고, 유독 승원에게만 곰살맞게 구는 민서가 오는 날을, 승원은 기다린다.

승: 장애인인 형의 자살 이후, 3월이면 악몽에 시달리던 민서는 자원봉사 차 방문한 시설에서 형과 분위기가 비슷한 승원을 만난다. 낯을 가리고 쌀쌀맞은 민서지만, 승원에게만은 살뜰히 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승원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연이은 불행에 승원은 힘들어한다. 그 모습이 꼭 자살 전에 형 같았던 민서는 승원을 책임질 방법을 찾는다. 한편, 민서는 승원과 특별한 사이가 되기 위해 사귀자고 고백하지만, 승원에게 단칼에 거절당한다.

전: 이후 민서의 서툰 시도들은 승원을 비참하게 만들고, 충동적으로 승원의 자위를 도운 날, 승원은 폭발하고 만다. 하지만, 민서가 너무 소중했던 승원은 결국 민서를 용서하는 한편, 민서는 그 날 승원에 대한 애정이 '성애'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번 큰 실수를 한 민서는 승원의 눈치를 보며, 승원을 애정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민서는 승원의 수술비를 지원하려 하고, 그를 알게 된 주변인들의 도움이 더해지면, 승원은 수술을 받고 회복한다.

결: 승원은 일상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 일상에는 민서가 있었다. 시설에 나온 이후 승원의 곁을 민서는 떨어지지 않고, 승원 역시 그런 민서에게 이성적 애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승원은 3월의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민서에게 키스한다. 이후 용기를 얻은 민서는 승원에게 고백하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한편, 민서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승원은 민서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깨닫는다. 민서의 입대 전날, 승원은 청혼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봄을 찾아서

빗물에 떨어진 벚꽃잎이 흐르는 물길을 따라 길게 띠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처연하면서도 화사해 보입니다. 봉우리가 움 틀 때는 '곧 봄이구나!' 봄 마중에 설레었던 것 같은데, 언제 할 일을 모두 마치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걸까요? 꽃은 어느 날 문득 만개해 있다가, 알아차릴만하면 지는 것 같아요. 좋은 것들은 그렇게 오고, 그렇게 가는 것 같죠? 그래서인지 '봄' 소설도 그 양가적 심상을 모두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봄의 열쇠'는 연상수의 비극과 연하공의 악몽으로 시작합니다. 주변엔 모두 착한 사람들뿐이지만, 두 사람은 홀로 분노, 혼란, 체념, 죄책감을 이겨내야 했죠. 그래서 초반 분위기는 회색 도화지에 그려진 도시처럼, 차갑고 외롭습니다. 승원은 친구의 어거지로 오토바이를 타게 되고, 사고로 두 팔에 심각한 장애를 얻습니다. 원망해야 할 친구는 즉사하고, 남은 승원만이 어머니의 오열과 아버지의 줄담배, 비참한 미래를 감당해야 했어요.

가난으로 받지 못한 수술, 생리적 현상조차 처리할 수 없는 무력감, 비통함에 젖은 어머니의 얼굴... 승원은 화나고 슬프고 답답하지만, 삭혀야만 하는 생활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교회의 도움으로 장애인 시설에 들어갈 수 있게 되자, 그 도피처를 고민 없이 선택합니다.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고 후련하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얼마 뒤... 부모님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고, 장례식장을 지키는 승원은 그 순간을 떠올립니다.

승원에게 남은 건, 혈혈단신 장애인으로서 살아야 할 삶이었어요. 그리고, 민서에게 위태로운 승원은 자살 전날의 형의 모습과 겹쳐졌어요. 민서는 삶을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형에게, 형이 더 지긋지긋하다고 모진 말을 내뱉고 학교를 가요. 하지만, 내내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하려 하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형은 돌아올 수 없는 사림이 되어 있었고, 민서에게 3월은 악몽의 달이 되었죠. 문자 그대로 말이에요.

민서는 과거의 실수를 다시 반복할 수 없었어요. 이때부터 민서의 고군분투기가 이어집니다. 소설 초반의 무거운 분위기가 유쾌하게 바뀌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할리킹인듯 할리킹 아닌 전개와 함께 말이에요. 무려 증여받은 건물로 임대료를 받는 민서는 승원을 책임지고 싶어 합니다. 친한 형 동생보다, 더 끊어 낼 수 없는 강한 유대를 원하죠. 하지만, 만 19세도 되지 않은 민서는, 결국 승원의 수술비를 지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민서는 엉뚱하게도 승원의 연인이 되려 합니다.

BL 소설이기에, 이 발상은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민서가 충동적으로 승원의 자위를 도와준 날, 민서는 손이 발이 되도록 용서를 빌고 승원에게 거부당하는 경험을 하지만, 승원에 대한 마음을 확신하기도 합니다. 민서는 승원도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동생계(?)와 우렁각시 전략을 구사하며, 정말 부지런히 뻐꾸기(?)를 날리고 가자미 눈이 되도록 눈치를 봅니다.

그리고, 민서의 노력은 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승원은 자신의 처지에 민서에게 마음을 밝힌다는 것이, 이미 받은 엄청난 은혜를 악의로 갚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역시 BL 소설이기에, 악몽을 꾸며 애절하게 매달리는 민서를 쳐내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민서를 잃을 뻔한 위기를 겪으면서, 바뀝니다. 승원은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끝내 청혼까지 합니다. 시린 겨울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어 주죠.

'봄의 열쇠'에서 공수의 심리와 일상의 묘사는 잔잔합니다. 그리고 연하공의 연상수에 대한 치댐은 달달해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할리킹, 구원물, 일상물, 성장물 등등 키워드로 특정하기에는, 다들 어느 정도는 있지만 완전하지 않아요. 저의 경우, 잔잔한 힐링물을 읽고 싶었는데, 승원의 수술이 성공하자 밝고 액티브한 캠퍼스물로 바뀐 것 같아 아쉬웠어요. 서정적 분위기가 안개처럼 깔려 있다가, 뚝 끊어진 느낌이랄까요.

민서는 승원과 애매한 관계일 때 미뤘던 입대를, 연인이 된 후 반년 뒤에 합니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보기엔 다소 가혹한 결말이죠. 입대 전날 승원이 민서에게 청혼하긴 합니다만, 결혼 반지 한 번 껴보고 군대에 못 가져간다며 다시 승원에게 맡기는 모습이... 제대 후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봐야만 이 찜찜함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작가님이 외전을 쓰고 계실 거라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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