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1 책갈피

" 빛이 하연준 씨를 좋아하나 봐요. 예뻐서 자꾸 보고 싶은 거겠지, 내가 그런 것처럼."

"......"

"하연준 씨는 내가 알고, 또 내가 생각하던 모든 걸 다 바꿨어요."

"......"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했던 것들이 다 기억이 안 나... 널 본 그 순간만 또렷해."

"저도... 저도 그래요. 배우님을 처음 봤던 그 순간이 아직도 또렷해요. 배우님만 보였어요. 다른 건 하나도 안 중요했어요."

연준의 초점이 평생 저에게만 맞기를 바랐다. 서정원은 식탁 위로 손을 뻗어 저를 향해 손을 내미는 연준의 손가락 끝을 살짝 문질렀다. 고작 손가락이 닿고, 얽혔을 뿐인데 긴장하는 얼굴이 예뻐 눈을 뗼 수가 없었다.

point 2 줄거리

기: 하연준의 삶은 불행했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만, 고모가 가해자에게 합의금을 받아 처벌하지 못했다. 고모는 연준 부모님의 보험금과 합의금을 받고도, 연준에게 눈치를 주며 박대했고, 사이코 사촌 형은 밤마다 연준의 방 문고리를 흔들어댔다. 결국, 연준은 지옥 같은 고모의 집을 나와 달동네에 혼자 살고 있었다. 사촌 형이 달동네 집으로 찾아올까 봐 무서웠던 연준은, 알바비 중 월 15만원만 남기고 모두 고모한테 보내며,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승: 그런 연준에게 유일한 행복은 배우 서정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따돌림으로 극한에 몰린 연준은 정원의 드라마를 보며 위로받았고, 그 이후로 정원에 골수팬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정원이 연준 앞에 나타난다. 달동네 연탄봉사를 나온 것이었다. 정원의 회사는, 이미지 관리차, 예쁘장한 달동네 팬과 정원의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 정원 앞에서도, 좋아한다는 티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연준의 모습에 정원은 죄책감을 느낀다.

전: 인간 자체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정원은, 연준에게 마음을 쓰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죄책감이라고 생각하고 잘 대해줬지만, 그 후에도 계속 연준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준이 자신의 손을 어설프게 잡은 날, 연준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한다. 정원은 연준를 집에 감금하고, 매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연준을 집에 들이지만, 정원의 사랑은 예상보다 격정적이었고, 연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욕심조차 접게 된다.

결: 한편, 정원은 연준의 사촌 형을 들쑤시고, 결국 공개석상에서 자신을 찌르게 만든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연준은, 정원을 다치게 만든 죄책감에 집을 나와 달동네로 돌아간다. 하지만, 연준과 정원도 이미 서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정원은 연준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연준의 고모와 사촌 형의 목줄은 정원이 쥐고 있었고, 정원은 연준이 받았어야 할 것들을 받게 해 준다. 두 사람의 격정멜로는 현재 진행 중이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격. 정. 멜.로.

'멜로'... '멜로'의 역사를 풀자면, 근대 유럽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물론, BL을 리뷰하면서, 가치관 전복과 여성운동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겠지만, 확실한 건 '멜로'라는 장르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왔다는 것이고,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죠. '여자들의 최루탄' '골 빈 통속 장르'로 비하 될 만한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요즘은 그마저도 찾아보기 힘든, 화석 같은 존재가 되긴 했지만요.

'로맨스'와 '멜로'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신파'적 요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파'를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작위적 설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확실히 '신파'가 감정의 폭이 크고 변화가 급격히 일어나는 극적 전개이다 보니, 세련미나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기도 합니다. 죽을 만큼 사랑하고, 죽을 만큼 슬퍼하고, 죽을 만큼 그리워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죠. 왜, 어떻게, 무엇을 같은 질문은 미뤄두고, 오로지 감정에 충실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격정'이라는 수식어가 '멜로'와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클레어님은 다작의 네임드 작가님이시지만, 개인적으로 저와는 잘 안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격정 멜로'라는 제목에 꽂혀서 읽었고, 결론적으로 만족했어요. 제목을 보고 예상했던 재미를 발견할 수 있었죠. 물론, 그간의 클레어님 작품을 읽을 때면,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요소들이 없기도 했고요. 설정만 잘난 공, 신경과 진료가 필요한 수, 해저터널 같은 고구마 전개 말이에요.

'격정 멜로'는 지독하게 불행한 삶 속에서, 동아줄 마냥 서정원이란 배우를 좋아하는 힘으로 살았던 연준이, 우연히 봉사활동 차 달동네를 찾은 정원을 만나 성덕이 되는 이야기예요. 전형적인 할리킹이죠. 그래서, '격정 멜로'의 포인트는 연준이 아닌 정원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원은 연준과 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집 안이 부유해 가난을 모르고, 넘치는 인기를 누리며,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죠. 하지만, 역시 불행했어요. 부모에게 비난받고, 인간을 혐오함에도 사랑하는 척 연기하고 살아야만 했으니까요. 정원은 거짓말 잘하는 기술을, 최고로 인정받은 셈이었어요.

정원은 까칠하지만,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런대로 배우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오기로 시작해, 큰 목표나 야망 없이 사는 무미건조한 삶... 너무 오래 사랑을 안 해서, 사랑할 수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 소설의 대사처럼 말이에요. 그러다, 흔들림 없이, 자신을 좋아하는 연준을 보게 됩니다. 싸가지 없게 굴어도, 욕을 해도, 심지어 아프게(?) 해도 한결 같이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사람... 일생 정원의 심장을 묶은 고삐가 풀립니다.

'결정 멜로'는 고구마 구간이 없습니다. 이것저것 눈치 보고, 복잡한 관계와 복층적 감정에 혼란스러워하고, 이리저리 찔러보는 과정이 없습니다. 가장 긴 삽질 구간이 사촌 형이 정원을 찔렀다는 것을 알게 된 연준이 죄책감에 달동네로 돌아온 부분인데, 하루 만에 해결돼요. 함께 있고 싶으면 동거하고, 걱정되면 물어보고, 화가 나면 복수하고, 미안하면 사과하죠. 사랑을 표현할 때는 사랑하는 만큼,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는 관여치 않습니다. 그래서 사건 전개는 단순하고, 캐릭터는 일차원적이에요. 나쁜 놈의 이면도 없고, 좋은 놈이 변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에너지는 '사랑하는 데'만 씁니다. 절절하게 고백하고, 애절하게 만지고, 격정적으로 사랑하죠. 그냥, 연준과 정원의 삶 자체가 한편의 멜로드라마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원의 모든 관심사는 연준이었고, 연준의 유일한 중요사항은 정원이었어요. 연준을 감금할 계획을 세우던 집착공은,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자신을 홀로 기다릴 연준을 가슴 아파하며, 연준이 원하는 수능 공부를 지원해 줍니다. 또, 대학은 안 보내리라 계획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연준을 보며 아직 나오지도 않은 장학금에 질투도 하죠. 정원의 계획, 살아왔던 삶의 방식, 모두 '연준' 앞에선 무효가 됩니다.

이런 사랑을 받으면, 조금은 변할 것도 같지만, 연준은 오로지 정원만 봅니다. 정원이 하자고 하는 건 무조건 좋고, 정원이랑 같이 있는 시간은 무조건 행복하고,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나 뿅~가죠. 연준은 절대적 약자이자 모순 없는 선인이고, 고모와 사촌 형은 반전 없는 악역이자 전형적 속물이에요. 그래서 정원은 밑도 끝도 없이 연준에게 빠져들 수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엔 오해도, 갈등도, 실망도 없거든요. 오로지, 두 사람을 둘러싼 적들이 있을 뿐!

하지만, 이런 점이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매일 연재로 볼 때는 '오늘도 그들을 달달하였다!'지만, 한꺼번에 보자면 씬+애절+씬+애절+씬+애절의 무한 루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격정적 감정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싶은 날에 선순위로 떠오를 작품임에도, 정주행을 생각하면 망설여집니다. 공수가 예쁘게, 한결같이, 사랑하는 모습만 보고 싶다! 하는 독자에게는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이고, 사랑도 좋지만 내용도 필요해!라는 독자에게는 다량의 스킵 구간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격정 멜로'는 회당 4천 자 이상의 분량을, 주 7일 연재(초반부는 주 5일 연제)로 휴재 없이, 100화 이상의 장편으로 마무리 한 작품입니다. 물론, 할리킹 클리셰를 '멜로'로 풀어낸 시도도 좋았지만, 작가님의 성실함과 책임감에도 감동받았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진지충의 Review에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인성이 좋은 작가의 작품이 꼭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면 작가의 인성은 상관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작가님의 좋은 면이, 작품을 읽을 때 독자에게 주는 선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저는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많이 기대하게 되었어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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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시크노블

출간일: 2019.02.21

분량: 본편 1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아직 안 잡아먹어."

그 말에 나는 안심을 해야 할지 아쉬워해야 할지 구분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조금 더 컸던 것 같기도 하다.

사장님은 손가락 끝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쓸어 갔다. 차갑던 손은 나를 자극하던 혀끝만큼이나 뜨거워져 있었다. 뜨거운 손은 목덜미를 타고 쇄골로, 쇄골을 타고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시 옆구리와 배꼽을 지나 골반 근처에 머물렀다. 나는 그 손을 따라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양손으로 내 골반을 쥔 사장님이 자신의 허리 짓에 맞춰 내 허리도 살살 돌렸다. 아찔한 자극이다. 얇은 천 하나를 두고 사장님의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형태도, 열감도.

사장님은 다시 한번 내 이마와 코, 그리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꼭 나를 안심시키려는 사람 같았다. 고개를 들어 사장님을 바라봤다. 사장님이 예쁘게 웃는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시각적인 자극에 정신이 팔려, 육체적인 자극에 정신이 팔려, 사장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를.

"대신 맛만 볼께."

point 2 줄거리

기: 더운 여름, 3개월 남짓 남은 입대를 핑계로 주유소 알바를 그만둔 강승태! 승태는 카페를 지나다 우연히 아르바이트 모집공고가 붙은 것을 본다. 그리고 홀린 듯 조건도 맞지 않는 알바를 충동적으로 지원한다. 당연히 면접은 순탄치 않았다. 그때, 한량 같은 사장이 나타나, 덜컹 승태를 채용하고, 승태는 매니저의 한숨과 함께 카페 알바를 시작한다. 서툰 승태를 언제나 미소로 지켜보며, 늘 피곤한 듯 게으름을 피우는 사장! 승태는 그가 궁금했다.

승: 일이 익숙해지자, 까칠하고 꼼꼼한 매니저는 승태를 남동생처럼 챙겨주는 정 많은 누나가 되었고, 사장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된다. 부티 나게 팔리는, 많은 양의 디저트를 새벽같이 나와 혼자 만들고, 그 와중에도 푸드뱅크에 기부할 빵까지도 챙긴다는 것,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 취한다는 것, 그리고 고등학교 때 아웃팅 후 집에서 쫓겨나 바닥부터 시작한 자수성가형 사업가는 것까지! 의외로 사장은 성실하고 멋졌다. 그리고, 자상하고 다정했다.

전: 승태는 물 흐르듯 사장 신이헌을 좋아하게 된다. 누가 봐도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었지만, 고작 스무 살, 한 번도 사랑을 해 보지 않은 순둥이는 그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그저, 카페로 찾아온 이헌의 옛 연인이 불쾌하고, 사장님의 '날 좋아해?'라는 질문에 콩닥거릴 뿐! 그렇게 카페의 나날들은 계속되고, 이윽고 승태의 입대 날이 다가온다. 마지막 회식, 술 취한 승태는 이헌과 제대로 대화를 마무리 짓지 못한 채 도망치듯 카페를 나온다.

결: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승태! 하지만, 입대 일주일 전... 뒤숭숭한 승태는 만취해 카페로 가고, 눈을 떴을 때 곁에 이헌이 있었다. 그리고 승태는 술에 취해, 제발 기다려 달라고 빌며, 나오면 정말 잘 해주겠다고 고백을 했던 것을 기억해 낸다. 승태는 흑역사가 생겼지만, 덕분에 연인을 얻는다. 그렇게 이헌의 곰신 라이프는 시작되고, 1년 반이 지나 제대한 승태는 이헌에게 어른들의 연애를 배워나간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연상과 연하의 연애란...

마음이 흑화 할 것 같은 날, 판타지급 달달한 일편단심 순애보와 저세상급 귀욤쿤의 재롱으로 백화하고 싶어집니다. 마침, 얼마 전 이웃 블로거님의 리뷰를 보고 흥미가 생겨서 장바구니에 담아 놓은 소설이 마크다운 행사에 나왔더군요. 그래서 냅다 구매를 했죠. 물론, 기대와는 약~간 달랐지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디저트로 비유하자면, 달콤하고 퐁실한 수플레를 먹고 싶었는데, 제법 잘 만들어진 새콤한 레몬 타르트를 먹은 기분! 음료로 비유하자면, 휘핑이 잔뜩 올라간 프라푸치노도 아니고 향이 짙은 에스프레소도 아닌, 카페라테!

분위기는 잔잔과 달달 사이, 인물은 발랄과 진지 사이였어요. 유명 디저트 카페의 일상, 스물살 대학생의 순수 라이프, 외유내강 사장의 씁쓸한 과거가, 플래터처럼 단권의 책에 모두 들어있고, 또, 애정사가 늦게, 서서히 전개 됩니다. 그리고, 수와 공의 온도차도 좀 납니다. 이헌은 승태의 감정을 알고 계속 힌트를 주지만, 적극적인 액션은 취하지 않고 관조하죠. 만약, 승태가 그대로 군대에 갔다고 하더라도, 굳이 상관하지 않았을 것 같은... 집착하는 연상, 순진순수 연하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꽁냥, 귀욤, 므흣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오히려, 그 자체로만 보면 더 이상적인 연상 연하의 조합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상은 여유롭고, 연하는 호기심이 많죠. 연상은 선을 지킬 줄 아는 겁쟁이고, 연하는 선이 뭔지 모르는 무대포구요. 표현은 다양하겠지만, 별별 일을 다 겪으면서 교훈과 상처를 적립하는 것이 '나이가 든다.'라는 걸 테니, 미지의 미래가 불안하면서도 기대되고, 교훈이든 상처든 적립할 에너지가 넘쳐나는 연하와의 온도차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레몬트리'는 입대 3개월 전, 운명처럼 시작된 아르바이트로 사랑을 발견한 승태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일들이 처음인 승태 일상은, 서툴면서 풋풋하고, 동공 지진과 두근두근의 반복이죠. 그런 승태의 눈에 사장 이헌은, 커피를 마시면 취하고, 알바생이 자신의 카드를 허락 없이 긁어도 관여치 않고, 나무 늘보 마냥 게으르면서도 훌륭한 카페를 가지고 있는, 신비의 생명체였죠. 시작은 순수한 호기심이었습니다.

고작 2개월 남짓 밖에 일하지 못하면서, 카페 알바 경험은 없어 가르칠 것은 많은, 0점짜리 알바생을 뽑았을 때부터 시작이었어요. 심지어, 그 다음날은 자신이 뽑았다는 사실도 기억 못 하는 이 남자! 하지만, 의외로 자상하고 상냥했어요. 실수도 너그럽게 넘겨주고, 날씨가 궂은 날에는 부러 카페까지 돌아와 집까지 데려다줍니다. 매일 새벽 엄청난 양의 디저트를 직접 만들고, 강의도 나가면서 봉사활동도 하는, 부지런쟁이에 능력자였고요. 승태의 호기심은 점점 관심으로 바뀌죠.

승태는, 대부분이 '처음'이었어요. 이헌의 전 남자친구에게 느끼는 이 불편함이 질투라는 것도, 눈이 가고 생각이 늘어가는 현상이 사랑이라는 것도 말이에요. 하지만, 사람의 무의식에는 '정답지'라도 있는 걸까요? 술에 취한 승태는 용기를 냅니다. 이헌을 찾아가고, 기다려 달라고 빌죠. 염치없고, 이기적이지만, 기꺼이 자존심을 버리고 온 힘을 다해 매달릴 수 있는 순수! 이것이 바로 연하 파워 아니겠습니까? 이헌은 기꺼이 곰신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다만,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줄 것처럼, 떡밥도 깔고 카페도 찾아온 전 남친에 대한 언급 없이 본편이 끝납니다. 승태는 궁금해하지만 묻지 않고, 이헌은 굳이 말하지 않아요. 외전에서 이헌이 승태에게 전 남친의 이야기를 말해주긴 하지만, 다소 수습성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분량을 좀 더 늘려, 승태의 좌충우돌 카페 알바기와 우여곡절 많은 사장님의 진면모를 좀 더 깊이 다뤘다면, 훨씬 풍부한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어요.

이헌의 카페에 베스트셀러 디저트가, 무설탕 스콘인데 말이죠... 왠지, 소설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담백한 디저트처럼, 크게 호불호 갈리지 않는 무난한 소설이었어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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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시크노블

출간일: 2017.12.15

분량: 본편 4권

 

 

point 1 책갈피

"...느는 그 섬서 암것도 아니었다. 적해도 섬노, 입 구멍 아랫도리 돌려쓰는 노예, 돈 몇천 원 받고 죽어라 일해서 몇십억 벌어다 주는 머저리 새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애인은 왜 시킸냐고? 느 구멍 내만 쓸라고 시킸다. 줘 패 놓고 로션은 왜 사다 주고 기름은 왜 사다 줬느냐 물었시? 구멍 쓰는 맛 안 떨어지게 관리하라고 줬다."

"......"

"느가 백날 일 다니던 양고미 밭 바로 앞 절벽, 느 애미 시체 거 있다. ... 즈는 지 애미 뼈가 코앞에 있는지 코밑에 있는지도 모르는 등신 새끼였시. 애미 보는 앞에서 구멍 따이고 애미 머리 위에서 궐련이나 피워 대는 머저리를 뉘 사람 취급 해 주간? 사람으로 안 보여 밉도 않았다."

철썩! 장우가 맞을 멎음과 동시에 이매의 손이 휘둘러졌다. 빛이 있음에도 어둠기만 하던 상자에 날카롭게 울린 소리에 다가오던 구두 소리가 우뚝 멎었다. 장우 뒤에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져 입을 크게 벌렸다.

불편하다 못해 섬뜩한 정적이 흘렀다. 돌아간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굳어 버린 장우가 거친 숨을 내쉬는 소리, 벌겋게 핏발 선 눈으로 장우를 노려보는 이매의 악문 이가 갈리는 소리가 짤막짤막하게 정적을 깨트렸다.

"...똑치 사람 배에서 사람으로 났긴데 왜 섬노만 사람 아닌데요."

point 2 줄거리

기: 험한 바닷길을 지나야 닿을 수 있는 오지 섬 적해도, 40명이 채 되지 않은 주민들이 대마를 제배하고 있다. 마약상 기현오와 남정태는 마약 '작업'을 위해 적해도로 들어가고, 돈이 두둑한 '객'을 이장은 받아들인다. 이장은 심부름꾼 이매를 시켜 객들의 식사와 잡일을 수발들게 했다. 기현오는 이매를 눈여겨보고, 곧 그가 대마 재배와 제조에 재주가 남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의 이상스러운 행동의 이유도 알게 된다. 그는 섬노였던 것이다.

승: 적해도의 섬노는 인간이 아니다. 앓다 말라죽을 때까지 섬 주민들에게 아랫도리 시중을 들어야 하는 여자 섬노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 남자 섬노는 굻어 죽거나 맞아 죽을 때까지 일하며 조리돌림 당해야 했다. 이매를 포함한 섬노는 3명, 그들의 삶은 시궁창이었다. 기현오는 그런 이매를 보며 분노를 느끼기 시작하고, 그 섬을 '정리'하려 한다. 기현오는 섬주민들을 헤로인에 중독시키고, 살인, 병화, 인신매매를 서슴지 않으며 섬을 장악하고 섬노들을 탈출시킨다.

전: 그 과정에서 이매의 출생 비화를 듣지만, 차마 알리지 못한다. 한편, 뭍으로 나온 섬노들은 인간다운 삶은 찾는다. 말과 생긴 건 험하지만 정 많은 정태는, 가족처럼 2명의 섬노를 챙기고, 현오는 이매와 연인이 된다. 이매는 처음으로 글자를 익히고, 노예가 아닌 '사람'이 사는 법을 배운다. 그러던 중 현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매는 현오의 '고객'을 만나고, 그를 피하려다 만난 무당에게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현오의 이야기와 너무 다른 잔혹사였다.

결: 현오는 결국 이매의 원해는 굿을 해주며, 알고 있었던 어머니의 삶을 알려준다. 현오는 이장과 이장 아들의 단죄를 이매에게 맡기고, 이매는 섬노로서의 삶을 스스로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이매는 현오의 마약 작업장이 되어 버린 적해도를 선물로 받는다. 한편, 이매를 건드린 '고객'에게 경고하기 위해 짜인 판에 이매가 등장하는 예외가 발생하지만, 현오의 계획대로 무사히 흘러간다. 현오와 정태, 3명의 섬노들은 '악인'이 사라진 적해도로 휴양을 떠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악을 벌하는 악

'정당화된 폭력'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둥근 세모'처럼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가령 교사의 채벌은 정당한가요? 저는 훈육의 도구로서 채벌이 얼마만큼 효과적이냐 따지는 사람들이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린다는 것이, '방법' 중 하나라고 믿는 점이 소름 끼치거든요.

무서워하는 사람을 다루는 건 쉽습니다. 그래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후배나 고용인, 부하직원, 심지어 서비스 직원에게조차도 공포감을 형성하고, 홀로 도취감에 취해 좌지우지하려 들어요. 편하게 내 맘대로 조종하고 싶어 하죠. 그들의 공포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황, 생활, 생존, 생계에 대한 것임에도, 그 순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게 공포죠. 마비시키고, 전염되고, 정당화되는 '고질적 악'이요.

때려 본 사람은 계속 때리는 것에 무감해지고, 때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손을 쉽게 올리지 않습니다. 폭력은 발생하면 무뎌지고, 무뎌지면 고착화되죠. 그런데, 폭력이 '수단'이나 '관행'으로 여겨지는 집단을, 법이나 도덕이 바꿀 수 있을까요? 그럼 어린 생명을 물고문해 죽이고도 몇 년 뒤면 출소할 아동학대범과, 평생 악몽에 시달려야 하는 피해자가 있음에도 나라에서 주는 기초연금을 받으며 일상을 누리는 성폭력범이 있는 사회는 공평한 건가요? 법은 법이죠. 하지만, 왜 폭력이 더 우월한 시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까요? 그래서, '악을 벌하는 악'을 바라게 됩니다.

적해도의 주민들은 폭력에 무감해진 악인들입니다. 스스로가 악인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악이 들러붙은 땅이죠. 그들은 묻에서 소히 '끈 떨어진', 즉 연고가 없는 아이들을 끌고 와 섬노로 부립니다. 굶기고, 때리고, 가두고, 화장실 가는 듯 강간하고, 그들이 피 흘리고, 부러지고, 곪어터지는 것을 즐기죠. 화풀이로 때려죽이고, 곶굴에 가둬 굶어 죽여도, 곧 또 다른 섬노를 데리고 와 그들의 일을 시킵니다. 이를 아는 섬노는 감히 도망갈 생각을 못 하고, 도망가려다 들킨 섬노는 바로 맞아 죽어요. 적해도는 완벽한 악인들의 '불가침 성지'인 셈이죠.

그런 악인들의 땅에 더 쎈 악이 들어옵니다. 기현오는 확실한 악입니다. 그는 사람도, 법도 미치지 못하는 천해의 마약 작업장이 탐났고, 대마를 다루는 재능을 가진 이매가 필요했죠. 섬주민들을 헤로인에 중독시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이고, 이장은 손발을 뚫는 고문도 하고, 박씨 형제는 태워 죽이고, 남은 주민들은 연변에 팔거나 다른 섬 일꾼으로 보내요. 그 섬엔 현오의 대마를 키워 줄 새로운 섬노들이 들어와, 뭍사람들을 중독시킬 아편을 열심히 키우고 있습니다. 현오는 엄연한 '약탈자'에요.

그럼에도 기현오 앓이를 가능케 하는 이유는, 현오가 '무엇' 때문에 분노했는가? 바로 그 '무엇'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오는 죽도록 일을 하면서도 '돈'대신 '끼니'를 받는다는 이매의 말에, 성시중을 들고 3장을 받는다면서 오만원이나 만원짜리 지폐를 낯설어하는 그의 눈짓에, 패악질에 얻어터지면서도 엎드려 죄를 비는 모습에, 분노합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차려준 식사를 칭찬해 주는 것만으로도 들떠 기뻐하는 이매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싶어, 글을 알려주고 과자를 사 먹이죠. 아파하는 것을 보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섬 밖에 악인과 섬 안에 악인은 그것이 달랐어요.

1권은 섬노의 비참한 생활, 2권은 현오가 섬을 정리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다 보니, 현오와 이매의 본격적 애정사는 3권부터 시작합니다. 쓴맛과 단맛의 비율 상, 단맛이 좀 더 적습니다. 게다가 쓴맛이 엄청 독하니, 현오의 집착 한 꼬집 다정함과 이매의 엉뚱 발랄 뭍생활이 달달해도, 전체적으로 무겁습니다. 피폐물은 설정상 어느 정도 잔인성을 깔고 있고, 사패나 연쇄살인범도 드물지 않게 등장하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으로 느껴지기에 즐길 수 있는 거 같아요. 근데, '적해도'는 아닙니다. 가상이되, 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아요.

물론, 이매와 수향, 철호의 뭍생활은 귀엽습니다. '잘 지냈다.'라는 인사가 '살쪘다.'인 세 사람의 해우는 가슴이 아팠지만, 카페 메뉴를 섭렵하고, 수향에게 휴대폰 사용을 교육받으며 쩔쩔매고, 도무지 100점이 나오지 않는 받아쓰기 점수에 낙담해하는 모습이 흐뭇합니다. 수향과 철호를 돌보는 정태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선인 같고, 이매를 애지중지하는 현오의 모습은 풋풋한 소년 같아요. 그들의 직업이 사람을 타락시키는 일이고, 살인, 고문, 협박을 태연히 저지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세 사람에게는 상량한 구원자였죠.

현오와 정태가 살린 사람보다 죽인 사람이 많고, 섬주민 수보다 섬노의 수가 적으니, 현오와 정태가 죽고 섬노가 학대 당하는 것이 전체의 공리는 더 높을지도 모릅니다. 더 옳은 결정처럼 보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왜 이장과 청년회장에겐 조금의 동정도 들지 않고, 현오와 정태는 기특하고 장해 보일까요?

건강한 한 사람을 죽여 그 장기로 열 환자를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건 '방법'이 될 수 없고, 이득을 따져 볼 필요도 없죠. 정당화된 폭력 따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폭력의 유용함을 따져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게 용납되는 사회라서, '섬노'가 '유니콘'이 아닌 세상이라, 악인에게는 악인이 되고, 선인에게는 선인이 되는, 그런 악인에 쾌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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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비욘드

출간일: 2019.02.14

분량: 본편 5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창밖으로는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9월이 되면서 거짓말처럼 해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저녁 8시면 해가 저물기 시작해서 9시가 지나면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제 매일 조금씩 더 짧아지겠지. 11월이 되면 오후 네 시만 돼도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12월이 되면 오후 3 시에 해가 진다. 극야가 시작되는 것이다.

백야가 강제로 며칠씩 현실에 붙들려 있는 느낌이라면, 극야는 반대로 종일 꿈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깨어 있기 위해 커피를 물처럼 마신다. 거리의 악사들은 흥겨운 곡을 연주하고 네온사인 불빛은 더욱 화려해진다. 극한의 밤을 견뎌내기 위해, 다들 필사적이 된다.

point 2 줄거리

기: 북유럽 연맹 수장국인 에시르는 강력한 전제정을 유지하고 있다. 에시르의 왕세자 리욘은, 군주의 덕목을 두루 갖춘 완벽한 후계자였지만, 병약한 선왕이 중국계 제노스 라우지엔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위기를 겪는다. 제노스는 염동력과 정신감응능력을 지닌 초능력자였고, 라우지엔은 친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리욘의 형을 죽이고, 리욘 역시 제거하려 한다. 리욘은 대관식까지 왕비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제노스 경호원 제이를 부른다.

승: 7년 전, 2황자였던 리욘은 왕립 사관학교 방학 때 제이를 고용한 적 있었다. 리욘은 왕비에 대한 반발과 남성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거부감에, 제노스인 제이를 박대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그를 믿게 된다. 하지만, 리욘은 왕자비 베아테에 의해 미약을 먹고 심신상실에 빠져, 제이를 강간하게 되고, 오해를 풀 기회도 없이 둘은 헤어진다. 이후, 제이는 리욘의 딸 시그니를 낳아 키우고, 약속대로 왕세자가 된 리욘은 제이를 호위로서 궁에 부른다.

전: A급 제노스인 제이는, S급 제노스로 추측되는 왕비와 싸우기 위해, 몸에 맞지 않는 호르몬제를 투입하고, 하혈하는 모습을 리욘에게 들킨다. 리욘은 왕비는 제노스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제이에게 키스한다. 리욘은 제이와 헤어진 뒤에 계속 제이를 그리워했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한편, 제이는 왕비를 돕는 진짜 제노스 앨런을 만나고, 자신보다 뛰어난 앨런으로부터 리욘을 지키기 위해, 리욘의 아이를 가지려 한다.

결: 제이는 임신하고, 앨런에게 큰 부상을 입히는데 성공하지만, 본인도 만신창이가 된 채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그동안 제이는 리욘에게 임신과 유산, 그리고 시그니의 존재도 들킨다. 리욘은 제이에게 청혼하고, 시그니를 후계자로 만들려 한다. 한편, 버림받은 베아테와 왕비 라우지엔은 제이를 노리고, 리욘은 왕비를 총살한다. 분노한 앨런은 리욘을 대관식에서 죽이려 하지만, 리욘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고, 무사히 왕의 자리에 오른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디테일 갑, 설정 덕후, 탄탄한 세계관, '대화'는 보너스예요~

과학시간, 처음 본 프리즘의 참 신기했습니다. 세모 같기도 하고, 네모 같기도 한 두툼한 유리 조각은 심심하기 그지없는데, 빛을 비추니 물감을 쏟아 낸 것처럼 선명한 색들이 하얀 바닥 위에 번졌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어떤 책을 보면 그 프리즘이 떠오릅니다. 책을 열어보기 전까지, 북 커버로 예상 가능한, 그 이상을 보여주는 책들이 꼭 오색 빛깔을 숨긴 시크한 유리 덩어리 같아서요. 빛이 비추기 전까지, 내가 읽기 전까지, 평범함을 가장하죠.

'극야'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공을 돋보이게, 수를 불쌍하게 만들기 위해, 피폐는 더 피폐하고, 달달은 더 달달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에피소드와 줄거리가 독주하고 있지 않아요. 하지만, 현재-과거-현재의 구도 중, 과거 부분이 설정 설명과 맞물려서 있어, 다소 장황해 몰입감이 떨어질 수 있어요.

많은 설정을 포함한 세계관과 강한 디테일은 강점이자 단점이 되는 셈이죠. 첫 장면이 7년 뒤 제이가 신분세탁을 당하고(?) 경호원으로서 리욘을 만나러 가는 씬인데, 제노스의 탄생 배경과 제노스가 고용되어야 하는 왕실 사정, 그리고 리욘이 제노스인 제이를 신뢰하게 된 과거사가 나열된 뒤에야, 비로소 대관식까지 리욘을 지켜야 하는 제이의 고군분투기가 이어지죠. 본격적인 전개는 2권부터 진행된다고 보심 될 듯합니다.

사건과 사건을 잇는 전개는 빠릅니다. 공이 수를 만났고, 공이 비운의 과거를 가진 황자여서 수를 거부했다가, 우연히 수와 뜨밤을 보낸 뒤 잊지 못해, 수를 경호원으로 불렀고, 알고 보니 딸이 있었다! 사건을 보면서, 다음 사건을 추측하게 되죠. 하지만, '극야'는 사건을 '잇기'보다는 서사를 '쌓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전개가 느립니다. 하지만, 탄탄해요. 글 초반에 제이가 되뇌는 마키아벨리의 명언은 극 후반에 리욘의 '결정'을 암시하고, 부녀의 다정한 시간을 묘사했던 장면 속 시그니의 행동은, 리욘이 딸의 존재를 알아채는 결정적 계기가 되죠.

'극야'에서 킬링 포인트나 감정 폭발 장면, 명대사는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계속 일상적 대화를 충실히 적립합니다. 흡사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극야'는 낮은 계단을 꾸준히 밟아 올라 절정으로 향한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쳐지거나 지루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 전개가 촘촘하고 짜임새 있어서, '아! 그래서!!!'라는 보물 찾기와 같은 쾌감을 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디테일도 감동적입니다. BL이 대부분 가상의 세계관을 설정하고 있고, 내용이 클리셰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디테일이 약하거나 생략되는 경우가 많아요. 가령, 집착광공 황제라고 설정해 놓지만, 보다 보면 말만 쎈 순둥이예요. 캐릭터를 뒷받침 할 디테일은 없고, 그러다 보니 사건마다 행동엔 일관성이 없고... 킬탐용이라고도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볍고 캐주얼하다는 게, 헐겁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유쾌한 명작들도 많아요. 그런 점에서 '극야'는, 조사한 자료를 다 쏟아 놓겠어!라는 정보 자랑 한마당도 아니고, 캐릭터에 맞게 필요한 설명을 잘 녹여 넣었죠. 균형이 맞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리욘은 절대적 권위를 지닌, 저세상급 고귀한 왕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리욘은 북유럽 연맹의 수장국이자, 강한 왕권을 유지하고 있는 에시르의 왕세자지만, 세계엔 '상징적' 왕만 존재하거나, 아예 왕이 없는 국가도 많습니다. 물론, 2021년을 사는, 에시르 국민들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리욘은 왕권을 휘두르면서도 대중 '정치'를 하고, 초법적 결정으로 베아테를 죽이면서도, 에시르 국적이 아닌 제이에게는 양육권 소송을 하겠다고 말해요. 리욘은 치열한 모략의 한복판에서도, 대외적 품격을 잃지 않죠. 리욘은 차가운 듯, 뜨거운 듯, 강압적인 듯, 회유하는 듯, 왕도 되고 제이도 얻어요.

제노스도 단순히 연구소에서 양산된 불쌍한 초능력자로 그리지 않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염동력과 정신감응능력을 지닌 돌연변이가 출현했고, 국가들은 그들을 '개발'하려 합니다. 하지만, 1세대를 통해 만든 2세대가, 2세대보다 3세대의 능력이 확연히 떨어졌죠. 그리고, 연구소가 해체된 뒤, 그들의 '이능'은 텔레키네시스 신드롬이라는 질병으로 명명되고, 제노스는 일반인 사회에서 함께 살게 돼요. 물론, 다름에 대한 차별은 존재했고, 제노스들끼리 뭉쳐 용병부대를 만들기도 하지만, 21세기에 사회는 그들을 '특이한 일반인'으로만 여겨요. 21세기 상식에 맞춰서 말이에요.

물론, 아쉬운 디테일들도 있습니다. 제노스의 힘을 증폭시키기 위해서 호르몬제를 투입하거나 임신을 해야 하는 설정은... 정말 BL답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설정이 있어서, 사랑스러운 시그니가 태어나고, 리욘을 거부했던 제이가 그와 뜨밤을 선택하게 되는 거지만!!! 다소 제노스의 탄생 배경에 비춘 다른 능력들과 결이 달라 튀는 느낌이었어요.

또, 앨런도요! 앨런은 제이의 존재를 알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제이가 자신과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게다가 먼저 적의를 밝히고, 수락할 수 없는 협상을 시도하죠. 앨런은 얼굴을 바꾸고, 신분을 위장하고, 왕과 카이옌 왕세자를 해치며, 긴 시간 공을 들여 라우지엔의 세력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제이에게는 지나치게 여지를 남기는 일들을 해요. 물론, 똑같은 A급 능력자지만, 장기간 투여한 호르몬제로 인해 제이를 이길 자신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라우지엔을 위해 살았던 절실하고 처절했던 앨런의 삶에 비추어 봤을 때, 의아했어요. 절실함이 밀당이 되던가 싶고 말이죠.

마지막으로, 제이와 리욘의 첫 만남! 여러 번 반복되기도 하고,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죠. 제이가 아이슬란드를 찾는 이유이고, 그때 리욘이 제이를 위로했던 동화 속 주문은 잊을 만하면 나옵니다. 또, 그 동화 속 주인공 '시그니'는 두 사람의 소중한 딸의 이름이, '리니'는 아들의 애칭이 돼요. 하지만, 리욘은 마지막까지 그 '첫 만남'을 모릅니다. 좀 더 극적 장면을 연출하는데 활용되거나, 후발 사건에 연쇄적 효과를 일으키는 계기가 될 거라고 예상했고 읽었던 지라, 아쉬움이 남았어요.

소설은 '백야' 파트와 '극야' 파트로 나뉘어 있어요. 백야는 7년 전 2황자와의 일화를, 극야는 7년 뒤 왕세자가 된 리욘의 이야기를 담고 있죠. 그리고, 작가님은 '백야'는 '강제로 붙들려진 현실', '극야'는 '갇힌 꿈'이라고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그 극야를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이 된다고도요. 어쩌면, 돈 때문에 고용된 용병이자 혐오스러운 에일리언 제노스, 유약한 형을 방패로 살아남아 왕이 되어야만 하는 2왕자, 미약을 먹여서라도 아이를 가져 왕비가 되고 싶은 왕자비, 이것들이 그들의 현실이었을지 모릅니다. 어둠이 없는 밤처럼, 숨을 곳도 쉴 곳도 없는 명확한 현실이요.

하지만, 사고에 휘말려 제노스는 부모가 되고, 비정한 현실을 살던 2왕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습니다. 그리고 7년 뒤 두 사람은 만나죠. 현실의 이탈이 꿈이라면, 분명히 두 사람의 재회는 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야, 극야, 오로라, 인간에게는 기적 같은 현상이지만 자연에게는 당연한 일상들이, '극야'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북유럽... 가보고 싶네요. 뜬금포 결말로 마무리 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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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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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더클북컴퍼니

출간일: 2018.07.05

분량: 본편 2권

 

point 1 책갈피

"제일 새로운 건 뭐였어?"

"글쎄요...... 새와 뱀은 워낙 달라서 이곳에 온 뒤로 새로운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처음에 오자마자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숲이었습니다."

"숲"

"예, 이렇게 넓은 숲은 이곳에 와서 처음 봤거든요. 제가 살던 곳에도 숲이나 산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도록 광활한 숲은 본 적이 없어요. 그게 꼭,"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뒷말은 그의 입속에서 끊겼다.

천창 위로 기울어진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나무를 거쳐 숲, 그리고 그 바깥의 어느 먼 곳을 본다. 사화현이 불현듯 중얼거린 것은 그 눈동자가 물빛이었던 탓이었다.

"바다 같았어?"

야휼이 사화현을 돌아보았다. 뜻밖인 듯 웃음이 사라진 얼굴이다. 사화현은 기묘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는지 아닌지 미묘하게 턱을 기울인 그의 낯에 이내 웃음이 다시 돌아왔다.

point 2 줄거리

기: 600년간 이어진 용족과 붕족의 전쟁은, 두 왕의 평화협정으로 끝났다. 그리고, 두 나라는 오랜 반목 관계를 청산하고 공존과 공영을 위해, 양국의 군사 협력 훈련을 합의 후 붕족의 땅 남단에 첫 훈련소를 개설한다. 그리하여 붕족의 남방신장이 다스리는 광활한 숲속, 붕족과 용족의 젊은 장교들이 냉정한 사화현 교관 아래 훈련 받게 되었다. 남방신장의 최측근 가신이자 죽마고우인 사화현은, 전쟁에서 6개의 날개 중 한 장이 찟긴 큰 부상을 입었다.

승: 한편, 술 게임 벌칙으로 '담당교관에게 한달간 음란 편지 쓰기'가 걸린 훈련병은, 담당 교관인 사화현에게 매일 연애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사화현의 사택으로 심부름을 간 훈련생 창틈에 끼여 있던 그의 마지막 연애편지를 우연히 줍는다. 사화현은 그 편지를 들고 있는 야휼을 보고 대답하려 하지만, 말을 맺기 전에 나타난 훈련생들로 인해, 그 편지가 벌칙의 일부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야휼은 사화현의 마음을 눈치채고, 사화현은 야휼이 알았다는 걸 안다.

: 야휼은 언제나 자신을 쫓는 사화현의 눈빛을 느끼고 있었고, 그날 그 의미를 알게 됐다. 두 사람의 성격은 과묵하고 무덤덤했고, 훈련생과 교관으로서만 서로의 일상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한편, 남방신장 고도가 자리를 비운 사이 눌린 흉신이 풀리면서, 고도는 제도에서 급하게 복귀한다. 용족을 끔찍이 혐오한 고도의 등장으로, 훈련소 내 두 종족 간의 대형 사건사고가 터지기 시작하고, 사화현이 마음을 준 야휼은 고도에게 경계와 미움을 동시에 받는다.

: 그리고 용족의 북방신장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야휼의 정체가 알려지면서, 깊어지기 시작한 야휼과 사화현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그러던 중 사화현은 야휼의 마지막 탈피에 휘말리면서 함께 고치에 갇히게 되고, 7번째 용으로 변태한 야휼의 격렬한 사랑을 받는다. 용이 된 야휼은 사화현을 데리고 고향으로 가, 프러포즈한다. 첫 군사 협력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사화현은 제대 후 용족의 북방신장의 땅, 야휼이 가꾼 숲에서 야휼의 반려로서 산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평화

평화가 뭘까요? 총포가 쏟아지고 지뢰가 널리지 않은 땅에 태어났거나, 굶거나 맞거나 얼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지 않다면, 평화로운 걸까요? 그럼, 지금 평화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평화병'에 걸려 태만해졌기 때문일까요? 원래, 동서고금 막론하고 살만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더 큽니다. 살만하지 않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낼 힘도, 기회도, 여유마저 없으니까요. 극한에 몰리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향해 비명을 지르죠. 그래서, 어쩌면 세상은 살만한 것처럼 보이고, 그 정도가 '일반적'이 되어,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가장하며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해와 전쟁은 명확합니다. 모두에게 살만하지 않은 세상이죠. 그래서, 모두가 평화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상실한 것들을 기억하고, 엇물린 것들을 풀어내며, 무너진 것들을 재건해요. '평화'에 대해 고민하고, 그렇기에 평화를 느끼기도 할 거예요. 밉상스러운 말 한마디, 예상에 못 미치는 결과, 막연한 불안감으로, 깨지지 않는 평화 말입니다.

용족과 붕족은 무려 600년간 전쟁을 치러왔습니다. 몰살된 마을이나 전쟁고아에 대한 이야기는 흔했죠. 재능 있는 자들은 모두 전장으로 모이고, 세상에 모든 승리와 성취는 그곳에서만 이루어져요. 학교도, 연구실도, 아틀리에도, 경기장도 아니라요. 전쟁터는 집 앞에 있었고, 누구나 그곳에서 친구나 가족을 잃을 수 있었어요. 600년이라는 시간은, 그 모든 현실이 무감해질 만큼의 긴 시간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평화가 찾아옵니다.

용족과 붕족 모두, 한 명의 왕과 사방을 지키는 네 명의 신장들을 주축으로 서열이 매겨집니다. 소수의 용들이 다수의 뱀들을, 날개가 많은 새들이 적은 새들을 지배합니다. 용>반 용>이무기>큰 뱀>작은 뱀, 날개8장>6장>4장>2장 정도가 되겠네요. 사회현은 8장의 날개를 가진 남방신장의 최측근 가신이자 소꿉친구로, 6장의 날개를 가진 강한 붕족이었어요. 그러다 날개 한장이 전장 중 뜯겨 나갑니다.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정신이 들었을 때, 전쟁은 끝나있었죠.

전쟁고아이자 상흔 군인인 사회현은, 종전 후 제대하려합니다. 하지만, 남방신장이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용족과 붕족이 최초로 시도하는 군사 협력 훈련의 담당 교관이 되어, 양 종족의 장교들을 가르치게 되죠. 언제나 무표정인, 유명한 전쟁 영웅... 사화현은 훈련생들에게 여러모로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현 역시 낯선 평화가 어려웠습니다.

'숲바다'는 이야기가 시작하자마자 엉뚱한 해프닝에 휘말려, 절대 고백 할 일 없는 수가 공에게 마음을 들키게 됩니다. 사화현은 한 달 내내 받았던 러브레터를 들고 집 앞에 서 있는 야휼을 보자, 얼떨결에 대답의 서두를 내뱉습니다. 하지만, 야휼은 떨어진 편지를 주웠을 뿐이고, 진짜 편지를 쓴 이는 곧 발각됩니다. 심지어 그가 편지를 쓴 이유마저요. 사화현의 고백은 온전하지 않았고, 야휼 역시 되묻지 않은 채,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지나가요.

하지만, 둘 사이는 미묘하게 바뀝니다. 교관과 훈련생, 감정 표현이 서툰 두 사람은,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산책을 하고, 사소한 관심사를 주고받고, 작은 약속들을 해요. 사화현은 야휼이 지나는 시간에 맞춰 산책을 하고, 야휼은 붕족의 무기를 사화현에게 가르쳐 달라고 하죠. 사화현은 휴가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는 야휼을 마중하고, 야휼은 사화현의 곁을 맴돌고, 틈이 날 때마다 노래를 불러달라고 해요. 두 사람은 훈련이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죠.

남방신장이 다스리는 광활한 숲에서 사화현은 숲지기를 꿈꾸고, 야휼은 고향의 푸른 바다를 떠올려요. '숲바다'의 풍경 속 두 사람은 '새로운' 평화를 경험합니다. '숲바다'의 갈등은, 오로지! 단 한 사람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바로, 남방신장 고도 말입니다. 8장의 날개를 가진, 최연소 신장, 잘 생기고 카리스마 있는 의리남이죠. 하지만, 감정적이고, 입이 험하며, 일중독자예요. 그리고... 용족을 혐오하는 '뱀 포비아'입니다.

고도는 마치 끝나지 않은 전쟁 같아요. 고작 두 왕이 만나서 서명했다고 진정한 평화는 오는 게 아니라는 듯 말이에요. 용족 훈련병들에게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폭력적으로 행동하며, 간신히 만들어 놓은 유대감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죠. 사화현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사화현의 부상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도, 심지어 사화현을 죽을뻔하게 만든 용족에 대한 복수심도 버리지 못합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쨌든, 고도의 등장으로, 잔잔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매사 무감한 인생을 살았던 야휼에게 격정적 분노와 독점욕, 힘에 대한 절실함이 생겨나죠. 얼음 같던 사화현이 화를 내고, 실망 하고, 욕구하게 돼요. 죽고 사는 전장에서, 딱딱해 굳어 마비되었던 감정들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감각'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평화의 시기가 되어서야 바랄 수 있는 소소하지만 위대한 미래를 함께 꿈꾸기로 해요. 고도의 목적과는 다르지만, 고도가 있었기에 얻을 수 있는 '평화'였던 셈이에요.

평화는 전쟁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과 평화'... '신과 바늘'같이 한 쌍 일 때 의미가 있는 존재 말이에요. 어쩌면, 나에게 평화가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내가 진정으로 치열한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지치고, 힘들고, 만성 두통에 시달리는 이유는, '치열의 대가'라기보다는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기다리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후회 없이 싸운 전사는 평화를 얻고, 미련과 후회가 많은 전사는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건지도요. 마치, 사화형과 고도처럼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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