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nt 1 책갈피

"억울해요."

그리고 유영의 답변이었다.

'억울해?'

희릉사의 몸이 우뚝 굳었다.

얼이 나간 그를 위로하고 유영은 서러운 말을 이어 나갔다.

"왕야가 이렇게 젊고 훌륭한데, 저도 어리도 혈기가 넘치는데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다니!"

그것은 실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으므로. 희릉사는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는 느낌을 받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억울해요. 왕야. 저는 너무 억울해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런 것 같았다.

유영은 실로 분통한 듯 의자를 부여잡고 울었고, 그 모습은 심지어 나라를 잃은 충신과도 같아 보였으니까.

'도대체, 유영아!'

이건 도저히 멀쩡한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희릉사가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끓는 읍소는 이어져 나갔다.

"조금이라도 기력이 좋을 때 많이 즐겨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 말을 내뱉을 때 유영은 의자의 팔걸이를 부여잡은 손에 힘을 주며 울먹거리고 있었다. 하도 기가 막힌 말에 잠시 생각이 정지되어, 희릉사는 꾀나 시간이 흘러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부인은 참 엉뚱해."

point2 줄거리

기: 황후의 아비 무구국은 사별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3명의 아름다운 음인 자식들에게 최고의 혼처를 찾아주려 한다. 그래서, 무구국은 아이들을 외부와 단절시키고, 규방에 가두어 길렀다. 무구국 황제조차 경계하는 혈통과 권력을 지닌 초왕을 둘째 사위로 정하지만, 정인이 있는 차녀 무유완은 혼례를 피하기 위해 평인이 되는 약을 마신다. 어쩔 수 없이 막내 무유영은 누이를 대신 혼례 하기로 하고, 마지막 자유를 허락받아 연등회에 참석한다.

승: 그리고 유영은 그곳에서 천상의 외모의 벙어리 귀공자 '사무'에게 한눈에 반한다. 본인을 '기유유'라 소개한 유영은 본능(?)에 충실하여 실수를 연발하지만, 사무는 한심하게 쳐다보면서도 연등회 내내 유영과 어울려 주었다. 그리고, 연등회 마지막날, 누이 대신 아버지에게 맞아 퉁퉁 부은 얼굴로 나타난 유영은, 사무의 밤을 간청한다. 두 사람은 연리강 변 오두막에서 애절한 하룻밤 보낸다. 그리고, 다음날 유영은 가면을 쓰고 나온 초왕과 혼례를 치른다.

전: 유영은 초왕에게 버림받는다. 1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영은 왕부를 벗어나지도, 초왕을 만나지도 못했다. 그리고, 유영은 간신히 시비의 도움을 받아 사무와 추억이 담긴 연리강을 찾고, 기적처럼 사무를 만난다. 하지만, 초왕이 사무를 해칠까 무서웠던 유영은 사무를 거부하고, 사무는 짙은 양인의 향기를 풍기며, 그런 유영의 모습에 화를 내며 거칠게 다뤘다. 유영은 사무가 '신방'이라 부르는 대나무숲에 속 전각에서 감금 당한채, 강간당한다.

: 유영은 말을 잃고 초왕은 자해를 하며 서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유영은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을 놓아주려는 초왕에게, 결국 임신 사실과 사랑을 고백한다. 그때, 그들의 전각에 황제와 무영의 가족들이 들이닥친다. 사무와 유영이 갇혀 있는 동안, 초왕과 초왕비에 대한 관한 흉흉한 소문이 퍼졌고, 이에 분노하며 쳐들어 온 것이었다. 이로 인해 서로가 초왕과 초왕비였다는 것을 알게 된 두 사람은 기쁨에 젖는다. 그들은 오해를 풀고, 행복한 신혼을 보낸다.

point3 진지충의 Review: "우리가, 우리가 있어!"(feat.염병천병 주접부부)

주접... 좋아하시나요? 만약, 지금 옆에서 지인이 주접을 떨고 있다면... 절로 한심한 표정이 나올 것 같습니다. 주접, 아무 말 대잔치, 아재개그, 부장님 농담... 극혐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랜선 상 주접은 왜 이렇게 재미있을까요? 가끔 리뷰어들의 기상천외한 주접 댓글들을 보면, 나에게는 왜 저런 주접력(?)이 없을까? 심지어 부럽기까지 합니다. 현생에서 '뭔 소리야?'싶은 것도, 글로 읽으면 입꼬리를 활짝 올리고 웃게 돼요.

여기에 진정한 주접 커플이 있습니다. 현재 채련담 2부인 '채련담 하화원앙'이 연재 중인데, 완결된 1부 속 초왕비의 주접이 '성격'이었다면, 2부에서는 초왕의 사랑과 응원에 힘입어 업그레이드돼요. 1부에서는 목구멍이 갑갑할 정도의 삽질 구간과 절절함과 빻빻함이 넘치는 피폐 구간이라도 있었으나, 2부는 이들 주접 부부의 민폐상이 연이어 펼쳐지고 있습니다. 물론, 갑자기 위기가 시작될 수 있겠으나.. 어쨌든, 2부도 완결되면 리뷰 하겠습니다.

채련담은 사건이 마무리됐는데도, 분량에 한참 남아있는 신비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죠. 작가님은 애당초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게 아니셨어요. 그저 본격적인 주접을 위해, 잠시 밑 밥을 깔는 과정이 필요했을 뿐이죠. 엉뚱 발랄 초왕비는, 홀로 규방에 갇혀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야 했던 긴 유년기에 대한 보상과, 오해로 인해 초왕비에게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른 초왕의 전폭적 지지로, 정말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초왕은 적통성을 지닌 유일한 황자였지만, 선황이 부고했을 당시 너무 어려 보위에 오르지 못합니다. 그 대신 황제가 된 삼촌은, 조카를 경계해 북방의 전장으로 보내 버리죠. 하지만, 어린 조카는 총명하고 아름다운 무재로 자라, 군부 세력의 정점이 돼요. 황제는 초왕이 권세가 외척을 만드는 것도, 통제 밖 먼 변방에서 강력한 군벌로 성장하는 것도 싫었어요. 그래서, 황후의 동생과의 혼례를 주선해, 초왕을 수도로 부릅니다.

수도로 올라오자마자 초왕은 추억이 서린 연리강을 찾아가요. 친모가 일찍 별세하자 초왕은 양모 슬하에서 자랍니다. 태후의 꿈을 안고 있던 양모는 초왕을 정성 다해 기르지만, 양모가 친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초왕에 의해 비극을 맞이하고, 이후 초왕은 잔악무도한 냉혈한으로 여겨져요. 아무도 그의 곁에 다가오지 못하죠. 초왕은 연리강을 보며, 자신이 죽였으나 잊지 못한 양모를 떠올립니다.

유영은 상큼 발랄 엉뚱한 4차원 소년이었지만, 아버지에 의해 조신한 규방 규수로서 길러지죠. 그리고, 지기 한 명 없이, 자신 안에 가득한 주접력을 억누른 채, 최초이자 최후의 휴가로 연등회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연리강에서 우수에 젖은 귀공자를 만나죠. 고삐 풀린 유영은 말실수와 손(?)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자신을 한심하고 추잡스럽게 바라보는 사무를 보기 위해 매일 연리강을 찾습니다.

초왕은 그런 유영에게 대꾸도 하기 싫어 벙어리인 척하면서도, 연등회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줍니다. 모두가 경외하는 자신에게 무례를 범하는 하룻강아지, 어째 귀엽기도 하고 챙겨 줘야 할 것도 같고... 초왕은 그의 삶에 없었던 낯선 감정을 느끼죠. 그리고, 초왕은 유영에게 각인이 되고서야 그 감정의 이름을 정확히 깨달아요. 초왕은 동상이몽 같은 초야를 보내지만, 유영만을 진정한 반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왕비에게 더욱 모질 수 있었던 거죠.

문제는 그 초야가 말이죠... 상식을 배울 길이 없었던 유영은, 자신이 말술인지도 모른 채, 좋은 술이라며 합환주로 자백제로나 쓰이는, 한번 마시면 천일을 잔다고 해서 이름도 '천일취'인 독주를 가지고 옵니다. 유영에게는 애절했던 하룻밤... 초왕은 기억이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자신의 동정을 가져간 기유유는 없었고, 연리강변에 방치된 채 사경을 헤매게 되죠.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가면을 쓴 채 혼례식에 참석한 초왕은, 초왕비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돌아섭니다. 숙취란 것이 이리 무서운 거예요.

어쨌든, 초왕은 유영을 열심히 찾습니다. 유영은 어머니 성 '기'와 아명 '유유'를 알려줬고, 막연히 초왕이 북부 군벌이기에 그쪽에 가서 살겠지 싶어, 북쪽으로 간다고 말해요. 덕분에 초왕은 북부를 샅샅이 뒤지지만, 유영은 수도에 있는 초왕부에 있었으니 당연히 '기유유'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1년 뒤 연리강에서 유영을 만납니다. 1년간 유영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무'를 그리워하는 것뿐이었고, 1년간 초왕이 한 일은 유영을 찾는 것뿐이었어요. 두 사람의 1년이 그랬습니다.

다만, 혼례식 날 본 초왕은 인정사정없는 사내였고, 소문으로 들은 그의 일화들은 잔인하기 그지없었죠. 강간이든 감금이든 사랑하는 사무와 있는 시간은 행복했지만, 그만큼 초왕이 사무를 헤칠 거라는 두려움도 커져갔어요. 게다가, 유영은 사무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홀로 깨닫습니다. 자존심에 금이 간 초왕이 사무를 고문하고, 자신을 감금하고, 아이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모르는 초왕은 유영이 자신의 양인을 그리워해 병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초왕은 그에게 유영을 보내주려 해요.

예, 딱 여기까지가 입니다. 다음은 정말 대환장 파티예요. 사랑스러운 주접부부는 그들만의 세상에 있죠. 무소 불이의 권력자 초왕과, 상식과 절제가 부족한 초왕비, 유영은 아버지의 훈육과 초왕비로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감춰 둔, 본인의 엉뚱미를 마음껏 들어내요. 초왕은 그저 유영이 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의 발 싸개가 되어, 황제의 진상품을 털어가며, 이루어 주죠. 때론, 임신으로 잠자리를 못하는 욕망쟁이 유영의 통곡을 들으며, 인내를 배우기도 합니다.

꽁냥꽁냥 달달물을 보면서, '더 해! 더!'를 외치는 것이 '맘'의 마음이죠. 예쁘고, 멋있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간질간질하고, 깨가 쏟아지는 그들의 모습에 광대가 승천하는 기분! 하지만, 채련담은 '더 해!'란 말이 도무지 나오지 않습니다. 정말, 이 염병천병 주접부부를 어째야 할까? 무수히 양산되는 피해자들의 어깨를 토닥이고 싶어진달까요. 참... 이것은 병맛과도 다른 개그물인... 그냥 '채련담'은 '채련담'인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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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리스(Formless) 본편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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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1 책갈피

"그때는 겁 좀 주고 옆에 두면 그만이었는데......"

강우의 시선이 못생긴 케이크를 지나 희운의 얼굴에 닿았다.

"이제는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서강우가 눈을 내리깔고 호흡 같은 웃음 흘렸다. 희운은 문득 가슴을 죄는 듯한 알싸한 통증을 느꼈다.

"나중에 선배가 또 도망치려고 하면, 그땐 어떡하죠?"

"... 도망 안 가."

"그렇겠지."

그렇게 물어놓고 서강우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희운이 모호한 표정을 짓자 강우가 평소처럼 여상히 말했다.

"겁도 많은 게 도망칠 용기나 있겠어?"

그가 눈을 휘어 웃으며 희운의 턱을 톡톡 두드렸다. 희운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서강우 없이 산다는 게 상상도 되지 않는 지금, 도망이란 건 너무 낯선 단어였다.

"혹시라도 그런 용기 생겨도, 가지 마요."

"응."

"잘해줄게."

"......"

"잘해줄게요."

서강우가 꼭 부탁하는 것 같아서 이상했다. 희운은 미소 짓는 강우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나중엔 네가 기라면 기게 생겼으니까."

중얼거린 강우가 못내 우스운 듯 피식 웃었다.

point 2 줄거리

특별 외전 1: 희운은 대기업에 취업한다. 강우는 희운의 취업이 탐탁지 않았지만, 취업을 했다며 가장 먼저 전화해 너무도 기뻐하는 희운을 막지 못했다. 희운이 회사를 때려치우길 바라며, 인내하던 날들... 그러던 어느날 희운이 회식에 가서 술을 조금만 먹겠다고 말한다. 다행히 희운의 애교짓으로 회식은 가고, 술은 먹지 않는 것으로 타협하지만,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희운은 처음으로 술에 취한 강우를 만나게 된다. 인내의 고삐를 풀어버린 강우말이다.

특별 외전 2: 드디어 희운이 벼르고 벼르던 첫 월급날이 왔다! 희운은 강우에게 맛있는 고기를 사주고, 강우는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생겨서 너무 기뻐하는 희운을 보며 감동받는다. 그리고, 희운이 고대하던 두 번째 해외여행 날도 다가온다! 강우는 이탈리아 여행 중 희운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선물로 커플링을 준다. 근래 회사 동료들과 친해진 희운을 보며 불만이었던 강우는, 희운이 모르는 뒷공작과 더불어 결혼반지급 커플링을 채우고 매우 만족한다.

특별 외전 3: 희운은 올해 처음으로 강우의 생일을 준비한다. 3년간 강우에게 받기만 하고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이제 직장인인 희운은 명품관에서 강우의 목도리를 산다. 희운은 깜짝 선물을 주고 싶었지만, 희운이 거짓말하며 숨기는 것을 본 강우가 무섭게 변하자, 바로 실토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은 희운은, 점심시간 쿠킹클래스를 다니며 생일 케이크를 만든다. 그 구겨진(?) 케이크를 받은 강우는 희운에게 서프라이즈를 금지시킨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사람은 참으로 변하지 않고, 또 참으로 잘 변한다.

두 번째 외전 리뷰를 써 봅니다. 외전을 본편 감상을 돕거나, 본편 이후의 후기를 들려주는 보조적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본편과 다른 이야기를 다룬다면, 그건 2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도 변해야 하나 봅니다. 'Kiss me, Liar 외전' 을 보면서도 생각했지만, 외전이 본편과 다른 메시지를 담고, 단순히 A/S 차원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아요.

3월 신작 캘린더를 보며, 찜해둔 유일한 작품! 바로 폼리스 외전이었어요. 짧은 분량이라 아쉬웠지만, 희운과 강우를 볼 수 있다는 기쁨에 전광석화 같은 클릭으로 내 서재에 담았죠. 4만 6천 자, 연재로는 13편 내외 단행본으로는 반권 정도의 분량에, 3개의 에피소드를 실어 놓았어요. 신입사원 희운과 강우의, 약간 맵지만 베이스는 달달한 일상물입니다.

이건 리뷰를 써야 하는 외전이다!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시점의 변화 때문이 그렇습니다. 사실, 본편에서도 3권 마지막에 강우 시점의 외전이 있었고, 특별 외전은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서술 시점 변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본편이 비참했던 희운의 인생이 강우라는 갑작스럽고, 예측불가하며, 비정상적인 존재를 만나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다루었다면, 외전은 반대로 강우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 변화의 차이를 비유하자면 희운의 변화가 불연속변이, 강우의 변화는 연속변이 같았어요.

희운의 변화는 빠르고 명확했습니다. 아버지는 거액의 빚을 남겨 놓은채 죽고, 심신이 아픈 어머니와 쓰레기 형을 의지할 수 없었죠. 희운은 똑똑하고 성실한 명문대생이었지만,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면서 암담하게 추락하고 있었어요. 조폭 할아버지와 기업가 아버지를 둔 강우는, 그런 희운을 가지고 싶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강우는 희운의 삶에 자신 이외의 존재를 끊어내요. 그 극열한 변화가 희운의 삶을 바꿉니다. 하지만, 희운은 그대로예요. 조금은 편해졌지만 무서운 강우의 눈치를 보고, 조금은 담대해졌지만 아직도 형에게, 직장에서, 생면부지 행인에게도 약자의 위치에 서 있죠.

반면, 강우의 변화는 느리고 모호했어요. 외전에서도 강우는 여전히 가업에 종사 중이고, 여전히 희운을 통제하며, 이유를 불문하고 그 영역을 벗어나려는 희운을 강제하죠. 희운을 다루는 수단으로서 '폭력'과 '협박', '비난'도 멈추지 않습니다. 단지, 강우 안에서 서서히, 하지만 분명히 무엇인가 변합니다. 바로, 강우를 참을 수 없게 하는 것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거죠. '희운의 감정'말이에요.

본편에서도 강우는 희운이 미소에 껌뻑 죽고, 무의식적 애교짓에 건물도 턱턱 바칩니다. 공항에서 희운을 발견한 순간, 온전한 강희운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하고, 절체절명의 타이밍에 나타나 희운을 완벽하게 포획하죠. 희운을 복학시켜줄 수 있었던 것도, 희운이 손 안에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어요. 언제든 다시 집에 감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하지만, 외전에서 강우는 희운의 표정을 살피고, 기죽은 모습을 보며 '자제'라는 것을 합니다. 과거 희운에게 조활동을 미룬 무임승차자, 사회생활 운운하며 술을 먹인 형, 전화 협박을 일삼던 조폭의 말로를 생각한다면, 강우의 고뇌를 짐작할 수 있죠. 그 결과로, 희운의 회사 선배는 위기를 모면 받고, 과외 학생들과 다르게 베이킹 강사와 백화점 앞 설문녀는 험한 꼴을 보지 않습니다. 강우는 생일초를 불며 희운의 퇴사를 빌면서도, 희운을 퇴사 시키지는 않습니다.

강우는 약자가 됩니다. 하지만, 희운이 강자가 된 것은 아니에요. 그저 강우가 변했죠. 그건 아주 유쾌하고 기분 좋은 패배처럼 보입니다. 강우는 깡패를 멸시하는 아버지에게 싫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불편한 아들이었고, 깡패 할아버지에게는 쓸만한 후계자였어요. 강우는 이들의 품평에 신경 쓰지 않고, 착실히 얻을 수 있는 이득만을 잘 챙깁니다. 잃을 건 그 뿐이었고, 이미 가진 것은 많았으니, 세상에 무서운 게 없었을 거예요.

그런 강우에게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생깁니다. 강우는 이제 '희운'뿐만 아니라 '희운과의 행복한 미래'도 가지고 싶어졌어요. 그 미래에는, 희운이 웃고 있어야 하고, 계속 사랑해야 하고, 렉시를 산책시키고 해외여행을 가고 저녁을 함께 먹고 기념일을 챙겨주는 무사 평탄한 일상을 보내고 있어야 하죠. 희운은 두 발목을 부러트린다고 해도, 마취만은 꼭 해달라고 대답할지 모르지만, 덜 웃고 오래 기죽고 더 겁 먹기 시작할거예요. 강우는 희운에게 비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릅니다.

독자에게는 작품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계속 외전이 나오고, 속편이 나오다 보면, 결국 그 작품 자체가 산으로 갈 때가 있거든요. 그러다 보면, 애정이 실망으로 바뀌기도 하죠. 그래서, 이대로 마무리되어야 충분히 훌륭한 이야기라면, 그대로 떠나보내야 해요. 하지만... 폼리스.... 도저히 놓을 수가 없네요. 작가님... 희운과 강우의 10년 뒤, 한 편만 더 써주시면 안 되나요? 이들의 변이는 아직 진행 중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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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BLYNUE 블리뉴

출간일: 2020.05.26

분량: 본편 3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유호가 블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이 유호의 손바닥에 닿았다. 단숨에 블린을 일으킨 유호는 블린의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를 빼내었다. 블린의 눈에 죄책감이 짙게 물들었다. 반지는 휙 던져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잡으러 갈 새도 없이. 블린의 몸이 침대에 앉혀졌다. 유호는 블린의 앞에 서서 어깨를 꽉 잡았다. 블린은 허리를 반듯하게 세워 유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옷은 직접 벗으세요."

블린은 머뭇거렸다. 차마 거기까진 못하겠는지, 손끝이 덜덜 떨렸다. 땀이 손바닥에 배어 자꾸 미끄러졌다. 용서를 빌겠다고 나선 주제에, 제 주제를 모르는 블린의 턱을 유호가 들어 올렸다. 유호의 눈을 마주한 블린은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벗기면, 그거 못 입으실 겁니다."

유호의 눈이 음험하게 반짝였다. 블린이 입을 꾹 다물고, 단추를 떨리는 손으로 풀었다. 유호는 탄탄하게 짜인 어깨 근육을 매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

"로즈하한테 들키면 미안하잖아요. 가릴 게 필요할 테니까, 옷은 그대로 가져가세요."

point 2 줄거리

기: 왕국 북부 변방 지키는 군인 블린 윈체는, 어느 날 설원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한다. 아들 마로가 떠오른 블린은 지나치지 못하고, 그 아이를 데려와 '로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아들처럼 키운다. 로엘은 천사 같은 외모로 블린바라기가 되어, 블린의 가족들에게 녹아든다. 한편, 용의 나라인 제국은 내전이 터지자 황자들을 주변국으로 대피시키고, 그 과정에서 후계자인 유호가 실종된다. 그는 블린의 이복동생이자, 왕국 공주인 이엘리아의 정혼자였다.

승: 그 후 5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날 블린의 집에 블린의 옛 동료 앨런이 찾아와 로엘의 친모라는 알리제프 부인을 소개시켜준다. 로엘은 알리제프 부인을 엄마라 불렀고, 그녀는 블린에게 실종경위를 설명했다. 로엘은 정든 블린가를 떠나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차일피일 미루던 이엘리아의 결혼은 드디어 성사되고, 블린은 이엘리아의 호위가 되어 제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성한 로엘을 만난다. 그가 바로 제국의 황자인 유호였다.

전: 유호는 블린을 격하게 반가워하며, 온 몸으로 치댄다. 이엘리아와 블린은 모두 당황하지만, 곧 제국의 주인이 될 유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반면, 유호는 블린의 가족들도 제국으로 초대해, 그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과 즉위식을 함께 치른다. 하지만, 곧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이엘리아는 황제 시해로, 마로는 황실 보물을 절도로, 사형에 처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유호는 그들의 사면을 대가로 블린에게 반려가 될 것을 요구한다.

결: 블린은 유호의 침실에 반감금되어 정사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블린은 이 모든 것이 유호의 계략이었으며, 제국과 왕국은 각각의 사정으로 블린의 희생을 방조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블린의 가족과 동료는 블린을 구조하려 한다. 그리고 성공 할 뻔 했지만, 결국 블린은 딸을 살리기 위해 유호와 각인을 맺은채 제국으로 돌아온다. 마침내 목표한 바를 이룬 유호는, 언젠가 반드시 블린이 자신을 좋아해 줄 것이라 믿으며, 느긋하게 그만의 신혼을 즐긴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NTR

NTR... BL의 대표적인 지뢰 중 하나죠. '네토라레'라는 일본어의 약자인데, '자다'라는 뜻의 '네루'와 '얻다'라는 뜻에 '토루'의 합성어인 '네토루'의 피동형입니다. '자서 얻었다.' 정도 될까요? 당하는 입장에서는 '내 애인이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빼앗긴 상황'일 테고, 하는 입장에서는 '짝 있는 상대랑 자서 빼앗는 상황'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막장의 향기가 나죠? 일본 성인 게임에서 나온 말이라 그래요.

뭔가 애로애로하지만 백치 같은 히로인과 주인공 사이에 'NTR남'이 나타나 성적 흥미로 갈취하는, 바람만 불어도 팬티가 보이고 수시로 얼굴 붉히는, 전형적인 남성 판타지의 소산이었죠. 물론, 'NTR여'도 있습니다. 빼앗기곤 못 살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역NTR도 있고요. 적용되는 컨텐츠가 많아지면서, 쓰임도 다양해지는 듯합니다. 심지어 애인을 뺏기는 내용만 있어도 키워드에 NTR이 뜨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어쩄든, 한국에서는 NTR을 '배우자'가 있는 사람을 빼았을 때 주로 쓰는 듯 해요. 장르소설에서는 자주 등장할 것 같은 자극적인 소재지만, 의외로 BL에서 흔치 않습니다. 삼각관계, 스와핑, 다공일수나 집단난교보다도, 제대로 된 NTR이 훨씬 드물어 보여요. 남성들은 NTR을 '로망'으로, 여자들은 NTR을 '분노'로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광염'은 특별해 보였어요. BL을 잘 보면 모럴리스한 피폐나 하드코어조차도, 행복한 가정을 파탄 내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배우자가 죽거나, 별거 중이거나, 정략적 혼인 관계거나,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중이거나, 심지어 두 집 살림을 하는 경우도 '수'의 갈취하기보다는 '공'의 욕심인 경우가 많아요. 완벽하게 잘 사는 부부 사이에 NTR남이 나타나, 선 섹스 후 갈취는.... 분명, 지뢰라 여겨 질 만한 불편함이 있죠.

블린의 가족은 이상적었어요. 블린은 아내 로즈하를 틈날 때마다 무릎에 앉히고, 옆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 당기며, 부대로 찾아오는 날이면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줬어요. 군인인 블린은 딱딱하고 기교 없는 남자였지만, 집에서만큼은 로맨틱한 남편이었고, 자상한 아버지였죠. 왕의 사생아로 태어나 왕실에서 부정 당한 채 군인으로서 살아야 했지만, 애정을 갈구하는 적통의 공주 이엘리아의 따뜻한 오빠가 되어주기도 하고요. 가족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블린이었기에, 협박의 수단도 당연히 '가족'이었어요.

블린은 여동생 이엘리아와 아들 마로를 살리기 위해, 인질이 되어 홀로 유호의 침실에 갇힙니다. 여기까지는 자주 보는 설정이지만, 신선한 점은 블린이 바로 이런 가족들에 의해 구출된다는 거예요. 이엘리아는 시간을 벌기 위해 유호와 독이 든 와인을 나누어 마시고, 주부에게 총잡이로 진화한 로즈하는 아이들과 함께 집을 떠납니다. 블린의 동료들 역시 고국을 버리고, 오로지 블린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요. 끈끈한 가족애와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블린 구조대는 거의 성공하는 듯하지만, 말도 안 되는 유호의 치트키에 좌초됩니다.

그 치트키도 가관입니다. 제국은 4마리의 용이 건국한 나라였어요. 하지만, 그 용들은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싶지 않았고, 마력을 늘리기 위해 인간들을 죽이다 보니, 인간 제물이 마르는 사태에 직면합니다. 용들은 살기 위해 인간이 꼭 필요했고, 결국 영혼의 반을 인간 반려와 나누어 가지는 '각인'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기로 해요. 최소한의 마력만 근근이 유지하면서요. 유호의 어머니는 독을 먹고 쓰러진 아들을 살리기 위해, 유호를 완전한 용으로 만들려 합니다. 그 대가는 왕국이 내 놓은 1만의 목숨이었죠. 유호는 후다닥 '그 일'을 해치우고, 부활(?)하여 블린과 그의 가족 앞에 등장합니다.

블린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유호와 반려 각인을 맺지만, 유호에게 고분고분 해지지 않습니다. 유호는 5살 때, 죽어가는 자신을 구해준 블린과 각인을 맺었어요. 용은 각인을 한 단 한사람과만 반려가 될 수 있고, 끝끝내 그 반려가 각인을 거부한다면 죽고 맙니다. 이것이 NTR남이 될 수밖에 없었던 유호의 변명일지는 모르겠지만, 죽더라도 블린을 로즈하에게 보내지는 않겠다는 유호를 보면, 결국 생사보다는 블린에 대한 독점욕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다만, 이전 리뷰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광염'은 '역키잡'의 배덕함도, '피폐물'에 빻빻함도... 좀 애매합니다. '수'가 정신적 굴복 상태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공에게 날이 서 있습니다. 심지어 외전까지도요. 유호는 블린을 빼앗는 것엔 전력을 다하지만, 블린의 감정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긴 시간 치밀하게 공들였던지만, 목표도 '블린과의 각인' 결론도 '블린과의 각인' 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유아르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유년기를 정말 사랑스럽게 묘사하세요. 이런 몽글몽글한 부자의 시간은, 극적인 관계 반전과 대비될 때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웠던 네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어! 라든가, 그렇게 사랑해 주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변하세요!라고 말이죠. 하지만, '광염'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변하니!'라고 외치는 사람은 '수'가 아니라 '수의 가족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 희생은 가족들이 하고, 블린은 한거 '실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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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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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주)현대지능개발사

분량: 본편 1권

point 1 한 컷

point 2 줄거리

기: 교실에서 BL을 읽던 이마이에게 코노스가 말을 건다. 코노스도 사실 BL을 읽고 있었던 것! 이마이는 자신이 게이인 것 같다고 고백을 하게 되고, 비밀을 공유한 이마이는 부모님의 사이가 안 좋아 늘 혼자인 코노스에 집에 드나들게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코노스는 이마이에게 애무해 준다. 이마이는 다정한 코노스와의 시간이 늘어나면서 코노스를 좋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코노스는 이마이에게 섹스를 제안한다.

승: 코너스와 첫 경험을 끝낸 이마이는 코노스에게 자신과 잠을 잔 이유를 묻는다. 하지만, 코노스는 이유는 필요 없다며, 남자랑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이에 상처를 받은 이마이는 코노스에게 화를 내고, 때마침 부모님의 이혼 때문에 코노스가 이사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은 오해를 풀지 못한채 헤어진다. 그 후 이마이는 BL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이마이는 새로 이사 한 집의 이웃 주민인, 코노스를 만난다.

전: 이사하자마자 이마이의 집에는 물이 새고, 이마이는 코노스의 신세를 지게 된다. 어색한 이마이와 다르게 코노스는 한결같이 다정했고, 남자를 찾으러 니초메로 간다는 이마이의 섹파도 되어 준다. 집이 수리하는 동안 코노스의 집에 머물면서, 회계사가 된 이마이와 웹디자이너가 된 코노스는 서로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물들어 간다. 그리고, 이마이가 감기에 걸린 날, 두 사람은 묵혀 둔 진심을 토로하게 된다.

결: 오해를 풀게 된 두 사람은, 삽질 구간을 지나, 고백을 하고 연인이 된다. 이마이는 코노스와 함께 BL을 고르러 서점에 가며, 즐거운 데이트를 즐긴다. 한편, 과거와 다르게 BL 수위는 과격해져 있었고, 두 사람은 첫 경험을 막 끝낸 풋내기가 아닌 야한짓에 목마른 성인이 되어 있었다. 이때도, 두 사람은 다소 과한 삽질을 하지만, 결국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즐거운 BL라이프를 즐기는 것으로 Happy ending!

point 3 진지충의 Review: Fac, si facis.(만일 그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 일을 하라!)

만약, 쉽다면 이런 라틴 속담이 있지도 않겠죠. 다이어트를 하려면 식사량을 줄이거나 운동을 해야 하지만, 피트니스센터를 끊거나, 운동복을 사고, 다이어트 보조제를 깊이 연구합니다. 공부를 하려면 책상에 앉아 문자를 눈에 비추고 뇌에 새겨 넣는 작업을 해야 하지만, 왜 책상 청소나 카페인 한 잔이 먼저 생각날까요? 의외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과 비슷하거나, 하고자 하는 일과 간접적으로 연관있는 일을 하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알고 있어요. 분명히 다르다는걸...

제3자 관찰자 시점에서 이런 모습을 본다면, 참 한심스러울 것 같아요. 바로, 삽질물을 보는 독자1의 시점이죠. 그럼에도, 삽질물을 보는 이유... 세상은 모호하고, 감정은 애매하고, 선택한 되돌릴 수 없으니, 결단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기에, 뻔히 보이는 길도 돌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에 공감하고, 안따까워 하는 거겠죠. 그리하야, 삽질물의 묘미는, 고구마 뻑뻑미와 답답 귀욤 멍충미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을 위한 권장도서'는 가는 선을 잘 쓰시는 요시다 유코님의 작품답게, 단정하고 깔끔한 작화가 소소한 일상을 배경으로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림 보는 맛이 있죠. 반면, 서로 좋아하는 게 뻔하지만, 공연한 삽질로 시간을 보낸 주인공들이, 재회 후 오해를 풀고 꽁냥꽁냥하며 사는, 단순하고 전형적인 클리셰를 다루고 있어요. 내용은 딱 그 한 줄 요약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수줍음 많은 이마이 자리에 찾아가 아는 척을 했을 때부터, 누가 봐도 코노스는 이마이를 좋아하는 거였지만... 뒤돌아 걷는 코노스가 자신을 돌아 봐주길 바랄 때부터, 누가 봐도 이마이는 코노스를 좋아하는 거였지만... 이마이는 코노스에게 몸을 내주면서도 고백하지 않고, 이마이를 늘 탐하는 코노스는 이마이에게 '남자'랑도 상관없다는 식의 객기를 부립니다. 두 사람이 하고 싶은 건 연애지만, 두 사람이 실제 하는 일은 삽질인 셈이죠.

물론, 두 사람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코노스는 불편한 가정사로 여유가 없었고, BLer인 이마이는 연애에 대한 환상이 있었죠. 그래서 코노스는 이마이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해 고민 없이 경솔하게 대답했고, 이상적 연인을 꿈꿨던 이마이의 첫사랑은 시작도 못 해 보고 꺾여버립니다. 코노스는 화를 내는 이마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의 비정함을 깨달은 이마이는 BL을 끊고 니초메로 가죠. 하지만, 이마이에게 누구도 코노스와 같은 마음이 되진 않았어요.

 

이마이는 '게이'이라는 정체성과 '연애'에 대한 환상으로 BL을 봤지만, 사실 코노스에겐 그런 것이 없었어요. 그저, 이마이에게 관심이 갔고, 어느새 눈으로 좇고 있었으며, 스킨십 욕구도 나날이, 충실히, 늘어갔죠. 하지만, 남자가 아니라 '이마이'에게만 가지게 되는 이 특별한 감정에 이름을, 삽질공답게 코노스는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리고, 둘은 성인이 돼서 재회를 해요.

코노스가 '네가 좋아.' 한 마디를 못해서 먼 길을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BLer들은 연애 이론만큼은 동서고금,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전천후의 전문가들 아닌가요? 하지만, 이마이는 '나를 좋아해?' 대신에 '나를 왜 잤어?'를 물어봅니다. 선수조차도 임자 앞에서는 서툴러지는 BL계에서, 일편단심 직진공도 그 질문에만큼은 달변가가 의외로 적지만... 어쨌든, 이론과 실전을 모두 경험할 수 있었던 BLer는 상처받습니다. 참 이상하죠. 연애를 하고 싶었던 이마이는, 그토록 상처받았지만 실제로 코노스에게 고백은 한 적은 없었어요.

이렇게 불안 하고, 간절히 원하고, 중요한 일인데도, 왜 회피하거나 미루는 걸까요? 오히려, 일상적인 사건사고들은 번거롭고 사소해도 기계적으로 해결하고 있는데 말이죠. 나는 왜 하고자 하는 일을, '지금' 안하고 있을까? 싫은가? 괴로운가? 끔찍한가? 생각해 보면, 의외로 그 일 자체는 문제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미루고 피하는 동안 겪게 되는 부채감과 초조함이 더 큰 문제죠.

필사의 각오를 다지게 되는 중요한 일일수록, 완전무결한 '상태'를 필요로 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늘 부족하고, 불안한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번지점프대에 오르는 것처럼, 막상 시작하지 못하고 그 근처만 계속 맴돌게 되는 거죠. 그러다 때론 그 일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꼭 '안 한 것'이 아닌 다른 원인을 들어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이대로도 괜찮아.' '꼭 타인의 기준을 맞춰 살 필요는 없지.' '나에게 필요한 건 휴식이야.' '어차피 이 사회는 뭘 해도 희망이 없어.' '올해는 삼재래'

이마이는 코노스와 섹스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스킨십을 욕구한 적이 없었죠. 다만, 상냥하고 다정한 코노스와의 시간이 좋았고, 자신의 비밀을 유일하게 공유한 사람이 코노스라서 더 좋았어요. 하지만, 코노스는 이마이에게 먼저 키스하고, 먼저 방으로 가자고 하고, 먼저 애무하고, 먼저 섹스하자고 했죠. 이마이는 코노스의 요구를 거부하고 싶지 않았고, 계속 좋은 관계이고 싶었어요. 그건 분명 '연인'을 바란 거였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준비' 되어야 할 게 있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 '염려'가 핵심을 빗나가 제대로 헛다리를 집게 만듭니다. 이마이는 BL를 끊을 필요도, 니쵸메를 갈 이유도 없었어요. 코노스는 이마이와의 관계를 몸뿐인 관계로 정의 한 적도 없고, 이마이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도 몰랐을 테니까 말이죠.

'Just do it' 그냥 좀 해! 왠지 영어로 해야 더 있어 보이는 까닭은 나이키의 영향일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는 법은 없습니다. 말을 해야 오해가 풀리고, 고백을 해야 연애를 하죠. 하지만, 이마이를 삽질이라 탓하는 마음 한켠이 찜찜한 이유는, 저 역시 지금 리뷰로 도피 중이기 때문일 거예요. 물론, 제가 해야 할 일을 해도 권장하는 도서 속 주인공이 될 순 없겠지만, 배드 엔딩을 피하려면 이제 just do it! 해야겠죠................. ㅜ.ㅜ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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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블랙아웃

출간일: 2019.04.15

분량: 본편 2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해 준 게 없다는 말 하지 마세요."

"......"

"이따위 세상인데도."

"......"

"형은 나를 살게 하니까.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니까."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이 온통 젖어있었다. 그 순간에는 정말이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저로 괜찮으냐고 했던 말이 한낱 투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지유환은 넉넉한 손으로 백성현의 얼굴을 감쌌다.

"형 말대로 안 괜찮아요."

"... 응."

안 괜찮은 현실. 이제껏 그런 현실을 발버둥 치며 살아왔다. 괜찮다고, 괜찮아질 것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그런 게 어떻게 괜찮아질 수 있겠어요."

애써 괜찮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과거의 기억들이 범람하듯 넘쳐흘렀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시설을 전전한 일. 누군가 쓰다듬어주지 않아도, 사랑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던 밤들. 혼자서 이겨낸 스스로가 씩씩하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날들.

"......"

지금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괜찮지 않은 것들 투성이었다. 버려지고 싶지 않았고, 누구라도 저를 쓰다듬어 주길 바랐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혼자서 이겨내고 싶지 않았다. 애초부터 자신은 그다지 씩씩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안 괜찮아도 돼요. 우리는 이대로도 충분히......"

지유환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백성현은 햇빛을 고스란히 받고 있는 눈앞의 사람을 응시했다. 이 조악한 방과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던 그는 어느새 이 방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point 2 줄거리

기: 군대를 다녀와 복학한 봄 학기, 말아 먹은 수강 시간표 탓에 백성현은 팔자에도 없는 문예과 교양을 듣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같은 수업을 듣는 청각 장애우 지유환의, 월 8회, 150만 원의 고액 노트테이킹 알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유환은 9살에 첫 시집을 낸 등단 시인이자, 190cm의 잘 생긴 외모, 천재 화가인 친모의 자살과 그로 인해 얻게 된 장애, 비사교적 태도로, 이미 유명인이었다.

승: 성현과 유환은 밥을 먹고, 미술관을 가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성현은 자신에게 다정한 유환을 짝사랑한다. 하지만, 고아원으로 찾아온 친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유환에게 전화해 듣는 이 없는 고백을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현은 감기로 결석한 유환의 집에 찾아가고, 그때 마침 출판사 전화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유환의 휴대폰이 걸려 온 전화를 자동으로 저장하도록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 그와 동시에 녹음된 '그날' 성현의 고백이 부지불식간 공개된다. 성현은 순간 절망한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유환은 성현을 좋아해왔고 숨긴 적 없다고 대답한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한편,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유환은 보청기마저 잘 적응하지 못하면서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지만, 성현에게는 좋아지고 있다고 거짓말한다. 반면, 성현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고장 난 라디오를 알아채지 못하는 유환을 보며 그의 상태를 짐작한다.

결: 그러던, 성현에게 친부의 부고가 들려오고, 성현은 쓸쓸한 장례식장에서 무기력했던 친부와의 마지막 대면을 떠올리며 후회한다. 성현은 유환을 찾아가 유환의 상태를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무능을 고백한다. 상처 많은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상처를 내보인다. 한 층 더 단단해진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계절은 돌고 돌아, 다시 봄이 찾아온다. 25살 성현은, 처음으로 축하받는 생일을 맞이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초봄, 봄비는 차갑다.

'꼴라쥬'를 초봄 제철 소설이라고 소개하긴 했지만, 사실 '꼴라쥬'는 봄에 만난 주인공들이 여름에 이루어져서, 가을에 동거를 시작해, 뜨거운 겨울을 보내고, 다시 함께 봄을 맞이하는 이야기예요. 사계절을 모두 배경으로 하는 셈이죠. 그럼에도, '꼴라쥬'를 초봄에 읽어 줘야 돼!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성현의 생일이 4월 8일이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무슨 덕후성 발언인가!!! 혹시, 주인공 발 사이즈, 시험 점수, 최애 브랜드명까지 외우시나요? 물으신다면,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기억 안 난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다만, 성현의 생일은 '꼴라쥬'에서 아주아주 중요한 날입니다.

꼴라쥬는 작은 조각들을 모아 부치는 일종의 미술기법입니다. 그리고, 아시나요? 꼴라쥬는 심리치료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 스스로 솔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조차,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상처를 드러내는 일은 더욱 힘들겠죠. 하지만, 하나하나의 시리고 아픈 편린들이 모아보면, 의외로 '끔찍한 자신'이 아닌 '굳세고 단단해진 인생'이라는 작품이 될 수 있잖아요. 소설 '꼴라쥬'에서 성현의 그런 눈부신 꼴라쥬 작품이, 바로 유환과 함께한 '생일 하루'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토록 눈부시게 빛나는 삶의 한조각.

이런 순간을 위해서 그렇게나 어두웠던 밤들을 견뎌왔음을.

색채와 결이 다른 삶을 살고 있던 당신을 찾아내기 위해서,

내 삶의 많은 조각들을 비워뒀음을. - <꼴라쥬>

이 소설은 서로를 위해 비워둔 조각조각의 빈자리를, 너덜너덜한 삶이라 여기며 살아왔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꼭 맞는 한 편의 꼴라쥬가 되어 주는 이야기입니다.

'꼴라쥬' 는 우연히 문예과 교양 수업을 듣게 된 수가, 시인인 공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예상가능하다시피 매우 서정적이에요. 두 사람은 시를 주제로 대화하고, 사랑을 나누며, 낭만적 시야로 잿빛 세상을 바라봅니다. 유환과 성현의 가정사, 떠나 버린 부모와, 남겨진 상흔,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그대로지만, 그들은 만났고 변했죠. 유환의 세상은 더 이상 냉소적이지 않고, 사랑니와 비를 핑계로 소리 죽여 서럽게 울던 성현은 서툴게나마 섭섭함을 토로하고 소리 내서 울 수 있게 돼요.

저는 이런 유환과 성현의 변화가 '봄비'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 어느 리뷰에서도 말한 적 있지만, 저에게 봄은 낭만의 계절이 아니라 '증명'의 계절입니다. 그 전 해의 '성적표'를 받고, 무엇인가 새로 시작해야 하는 압박의 시기지요. 어느 때는 박수를, 어느 때는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모두 긴장과 불안이 따릅니다. 학생 때는 시험을, 사회에 나와서는 때마다의 과업을 이유로, 봄마다 안도와 회한의 한숨을 많이 쉬었었죠.

어쨌든, 그래서 저는 멍~ 놓고 볼 정도 봄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저들이 모두 '금메달리스트'이기 때문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많은 씨앗이, 봉우리가, 혹은 묘목이 있었을 테지요. 그들 중에 씨앗 표피를 뚫고, 겹싼 잎사귀를 세차게 밀치고, 찬 땅에 굳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틔운 승자만이 단상에 올라 찬사 받는 무대가 봄 같거든요. 그렇다면, '봄비'는 그들에게 마지막 스퍼트를 내야 하는, 결승선 직전에 가장 가혹한 시련일 거예요.

그때 어쩌면 씨앗은 흙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몰라요. 어차피 겨우내 어둠 속에서 살았는데, 굳이 차가운 비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지상으로 가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이대로 계속, 축축하지만 안전한 흙 속에 있고 싶어!라고 말이에요. 그렇게 살아왔다는 건, 살아 본 적 없는 희망보다 강한 관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변화란 늘 쉽지 않은데, 가장 삭막한 계절에서 가장 화려한 계절로의 포문을 여는 '봄비'가 호락호락 할 리가 없겠죠.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그리는 미술 시간이 곤란했던 성현은, 스스로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 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4살까지 산타클로스를 믿었던 순수함은, 모두가 아는 진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겪어야만 했던 고독으로 이어집니다. 성현을 찾아온 생부는 반성을 하며 살았노라 용서를 빌지만, 성현은 그 중년의 남성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저 어렸던 어느 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바랐었다고... 긴 시간 참고 눌러 온 외로움에 대해 어설픈 투정만 어설프게 남겨요. 그리고, 얼마 뒤 생부의 부고를 듣습니다.

24번이나 돌아왔던 생일마다 축하받고 싶었지만, 축하받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던 외로운 아이는, 그 외로움이 굳어져 숨구멍을 막아도 벗어나는 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생부에게 당신의 칭찬이, 애정이 절실했었다고 원망도 제대로 못하고, 용서할 수 있는 기회조차 상실해 버리죠. 그래서, 성현은 고장 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유환을 보며 덜컥 겁이 납니다. 분수에 맞지 않은 사랑을 탐내다, 유환을 망쳐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죠. 숨겨 곪은 상처는 아프지만, 그건 익숙한 고통이니까요. 그래서, 유환의 상태를 모른척하며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생부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성현의 둑은 터져버립니다.

성현과 유환은 괜찮지 않습니다. 괜찮아질리 없는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은 '괜찮아질리 없는 삶을 이어가는 것'과는 다른 어려움이었어요. 유환이 성현을 믿지만 적응하지 못한 보청기에 대해 고백하지 못한 것처럼, 성현이 유환을 사랑하지만 생부에 관해 언급 한 적 없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건 두 사람에게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고, 해 본 적 없는 힘든일이지만, 진실로 안온한 땅에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난관이었죠. 마치 봄비처럼요.

봄비는 우아하거나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차갑고 다급하죠. 그 부지런한 알람은 '타닥타닥' 거칠고 지면을 난타하는 터프함을 보이며, 많은 생명들에게 '마침내 곧 너희들의 시절이 도래할 것이다!'라며 준비 사인을 보내는지도요. 그래서인지, 저는 봄꽃을 보면 대견스럽습니다. 예쁘게 펴줘서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올해도 펴줘서 말이에요.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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