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비욘드
출간일: 2017.03.03
분량: 본편 2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완전히 결박된 후에야 소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환이 안에 진득하게 파정하자 소영의 아랫배가 볼록해졌다. 내장을 틀어막은 압박감에 얕은 숨만 간신히 내뱉으며 눈물 흘리는 소영의 귓가에 대고 환이 속삭였다.
"영희공 환소영은 귀비에 봉하고 원자 호를 내려 그를 원귀비라 한다."
자신을 귀비에 봉한다는 말에 소영의 젖은 눈이 커졌다. 현재 황제의 후궁 중에 정일품 비는 품계를 받은 이가 없었다. 소영이 결박의 고통도 잊고 저를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자 환이 다정스레 웃으며 그 눈가를 쓸었다.
"처소는 영수궁으로 하나, 짐의 별궁인 양심전에서 옮겨 가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 황제의 화원인 어화원에 유일하게 출입을 허락하며 원한다면 언제든지 짐에게 함께 가자고 청해도 좋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교지를 읊는 양하시는데 소영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귀비의 태에서 나는 황자가 이 나라의 태자가 될 것이며 그 태자는 짐의 뒤를 이어 다음 대의 황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자신과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해서 기어이 눈물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짐은 귀비를 닮은 황녀도 기꺼우니 귀비는 괘념치 말라."
덧붙이시는 말씀이 왠지 귀여워서 소영은 결국 웃어버렸다.
point 2 줄거리
기: 직첩조차 받지 못한 천한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난 5황자 소영은, 궁인들의 박대와 괄시, 황자녀들의 괴롭힘을 당하며 삼남소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소영을 유일하게 아끼고 보살피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태자 환이었다. 태자는 동궁에 소영을 불러 함께 생활하고, 음인이 소영에게 발정기가 오자 최측근인 중랑장 민석호를 시켜 시침을 들게 한다. 당연히, 태자의 이런 총애는 시기를 불러왔고, 소영은 태자비의 눈 밖에 나 동궁에서 쫓겨난다.
승: 황후는 완전한 음인이 된 소영을 민석호에게 보내려 하는 한편, 소영은 무작위로 발정기가 찾아오는 야화라는 것이 밝혀지고, 잠잠했던 태자비의 행보도 거칠어지자, 태자의 마음은 급해진다. 사실 태자환은 소영에게 좋은 형의 가장하고 있었지만, 어린 소영과 각인이 되면서 양인으로 발현했고, 그 후 이복동생인 소영을 온전히 얻기 위해 준비해 왔었다. 하지만, 황제의 양위가 생각보다 늦어지면서, 소영의 초야를 뺏기고 소영마저 잃게 생긴 것이었다.
전: 마음이 급해진 태자는 소영의 몸을 끈덕지게 길들이고, 소영은 그런 형에게 이성적 성애를 느끼며 혼란과 갈등을 겪는다. 그때 마침, 소영은 자신의 약혼자이자 자신을 사랑하는 민석호와 함께 잠시 숨을 돌리러 출궁하고, 환은 허락 없이 사라진 두 사람에게 분노하며, 소영을 거칠게 대하고 강제로 각인한다. 그 후 상처 입은 소영을 달래 간신히 연인이 되지만, 야화라는 소문이 돌면서 결국 소영은 황적에서 제적 당하고 정업원에 유폐되기에 이른다.
결: 하지만, 갑작스러운 낙마 사고로 마비가 온 황제가 태자에게 양위를 결정하면서, 환은 곧 소영에게 '환'이라는 성을 내리고, 영희공에 봉작하여 곁에 둔다. 한편, 황후의 직첩을 받지 못한 태자비는 사가의 연이 있었던 의친왕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지만, 이미 만만의 대비를 하고 있던 황제에 의해 발각된다. 환은 소영을 귀비로 삼고, 소영에게서 자식들을 본다. 그 후 민석호는 문성황녀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소영은 황후가 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자낮수
근래 문득 자낮수가 참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스라이팅이 자주 당장하는 피폐물이나 할리킹의 일부에서나 볼 수 있었던 키워드 였던것 같은데... 이제는 스릴러, 판타지, 일상물 할 것 없이, 자낮수가 등장합니다. 우연인지, 최근 저의 책장을 메운 책들 중에서도 많은 유형의 자낮수가, 다른 소재와 장르의 이야기 속에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아시나요? 리디북스에 자낮수 키워드가 없다는 것!
드라마는 시대의 이상을 반영하고, 소설은 시대의 아픔을 반영한다. 어디선가 읽었던 구문인데,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드라마나 소설이 그만큼 대중적 채널이고, 어떤 형식으로든 시대를 투영하고 있다는 거겠죠. 유난히 '헬 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때에 '이세계물', '회귀물', '환생물'이 많아진 것 처럼요. 그렇다면, 걱정 많고 늘 불안해하지만, 알고 보면 재주도 많고 사랑스러운 자낮수도 이 시대 일면을 비추고 있는 걸까요?
'야화'는 고백하자면, 한번 읽고 방치한 많은 도서들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다시 보니, 조금 다르게 보였어요. 문득, 이 책이 절륜한 황제와 백치 이복동생의 씬풍년 시대물 BL이 아니라, 환의 일생을 건 계략기 혹은 한걸음 당 한 번씩 '자낮의 덫'에 빠지는 소영의 구원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환을 보며, '집착' '광공'이 아니라 '성실' '헌신'이란 단어를 떠올렸다는 것이, 저조차도 낯설었어요. 분명, 제 기억 속 '야화'는 킬탐용 뽕빨물이었거든요.
일단, 제가 과거 '야화'를 저평가했던 이유는, 갈등이 변변찮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어요. 출신도 천하고 뒷배도 없는 5황자 소영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짓궂은 황자녀들의 괴롭힘 대상이었죠. 게다가, 소영의 유일한 동아줄 태자에게는 황후의 조카인 태자비가 있었고, 그 묘가는 견고한 외척세력으로의 입지를 다지며 정치력을 키워왔어요. 황제가 될 것이 확실한 태자에게는, 소영을 반려로 맞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힘든 일이고, 당연히 갈등도 많긴 했지만...
황제가 허무할 정도로, 너무 쉽게 모든 일을 해결합니다. 소영을 사랑한 민석호는 소영의 시침도 들고 약혼자도 되지만, 단 한 번의 반항도 없이 소영을 포기합니다. 태자비와 의친왕의 반역은 놀랍도록 위협적이지 않았고, 황후는 불용패 조카를 쉽게 버립니다. 태자는 황제의 낙마사고도, 소영과 환의 관계를 반대하는 상소들도, 어렵지 않게 처리하죠. 물론, 소영을 단 한번이라도 건드린 자들을, 그 시기와 신분를 불문하고 톡톡히 복수해줘요. 그래서 갈등은 있으나, 갈등 풀어가는 재미는 좀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첫인상이 '나쁨'이 아니었던 건, 분량과 가격이 혜자스럽기 때문이었어요. 한 권 10만 자도 안 되는 소설들도 즐비한데, 야화는 한 권 당 20만 자초과에 4500원! 가성비가 우수하죠. 또, 환의 원앤온리와 소영의 귀욤귀욤에도 후한 점수를 줬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정신만 들면 '그' 생각뿐인, 절륜한 황제의 씬씬씬은 달달구리하지만, 지나치게 왕성하셔서 소영도 지치고, 보는 독자1도 어느 순간 흐린 눈 스킵을 하게 됩니다.
이 소설에는 숨겨진 섭공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설표'예요. 한결같이 소영을 바라보는 순정파 표범이죠. 물론, 나중에 반려를 만나 아이를 낳고 잘 산다만은... 나름 애정에 목마른 야수예요. 소영은 분명 일부의 황자녀들과 권력으로만 가치를 평가하는 궁인들에게 괄시 받습니다. 하지만, 두 섭공인 민석호나 설표에게, 일반적이지 않은 독점적 애정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자의 절대적 비호를 받고 있고, 태자는 그것을 외부에 숨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소영은 태자의 권위를 앞세워 호가호위할 수도 있고, 그럴 깜냥에 없다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권력자들에게 고단한 삶에 대해 토로하고 기댈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소영은 태자가 위대한 줄은 알아도, 태자가 사랑하는 자신은 '이복동생'이고 '야화'라는 이유만으로 유령이 되어 평생 후궁에서 비참한 삶을 살 거라고 무서워합니다. 민석호가 공신 가문의 장자이며, 많은 황녀들이 꿈꾸는 이상적 반려임을 알아도, 대 놓고 구애하는 민석호의 약혼자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 줄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이 소설을 많은 갈등을 열심히 풀어가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갈등은 암투도 아니고 근친관계도 아니었어요.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어 하는 소영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황제가, 설득하고 달래고 안심시키는 과정이었던 거죠.
태자의 첫째 미션, 선물 주기! 태자가 어린 소영과 각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환은 서서히 소영에게 '주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궁박한 소영에게 하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죠. 많은 이들은 하사받고자 했고, 하사받았다는 사실을 떠벌리며 친분을 과시하고 싶어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소영은 주면 쩔쩔매고, 없는 살림에 답례품 구해오고, 답례품 대신 연주를 듣게 된 후로도, 너무 자주 준다며 부담스러워하죠. 소영에게 태자비도 누리지 못한, 태자의 지밀을 공유해 주었음에도, 태자비가 쫓아내면 고자질은 고사하도, 냉큼 초라한 남삼소로 돌아갑니다. 태자가 준 팔찌는, 착용하지 않고 상자에 보관만 해요.
태자의 둘째 미션, 안심시키기! '야화'의 설정상, 양인이 음인과 각인이 되면, 자신의 음인 이외에 만족감을 얻지 못할 뿐 관계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반면에, 음인은 오로지 각인한 양인과만 관계를 할 수 있죠. 태자는 소영을 안고 포태시키고 싶었지만, 황제가 될 때까지 참아야 후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소영의 발정기에 믿을 수 있는 민석호를 보내지만, 가까이 각인된 음인을 두고 안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소영에게 각인을 합니다. 하지만, 각인 전의 고난보다 더 큰 고난이 있었으니, 그것은 소영을 달래는 일! 태자는 지존이지만, 태자의 약속은 믿을 수 없는 것일까요? 사모하고, 어떤 경우에도 보호해 주고, 그대가 낳은 아이를 태자로 삼겠다고 달래어도, 소영은 세상에 손가락질 받고 이름 없는 자가 되어 어느 후궁의 전각에서 비참한 생을 이어갈 거라고 태자를 원망하죠. 야화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태자는 '정말' 비참한 상황에 놓일 뻔한 소영을 기지와 협상으로 구해내지만, 소영은 보호받았다는 '증명'보다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슬퍼합니다.
태자의 세 번째 미션, 결혼하기! 태자는 황제가 된 후 황적에서 지워져 평민이 된 소영을, 영희공으로 봉작하면서 형제가 아닌 황족으로 만듭니다. 또, 자신의 이름에 획만 바꾼 '환'이라는 성을 주어 '내 사람'임을 찜하고, 즉위식 연회장에서 나쁜 손으로 '내 음인'임을 만인에게 알립니다. 게다가 소영을 구박했던 태자비는 황후는 고사하고 재인이 되었고, 소영에게는 태후라는 든든한 우군도 있어요. 하지만, 소영은 귀비가 되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죠.
소영은 태생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고, 주목받는 자리가 무서우며, 황제의 총애는 받아도 총비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황제와 보내는 밤이 늘어나나 회임을 하지 못하자, 황제에게 후궁을 권하기도 합니다. 후사의 책임은 막중하고, 환을 독점하고 싶어도, 독점할 자신은 없었죠. 황제는 이미 오래전에 소영의 독점물이었음에도, 황제는 소영의 시기심을 자극하고, 자리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며, 어렵게도 소영의 반려가 돼요.
자낮수가 고구마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자낮수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게끔 만드는데,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인들 중 자존감이 떨어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 때문이다, 경기 때문이다, 자연재해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위로가 되었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 위로의 유통기한은 의외로 짧아서, 당장 되는 일이 없으면 자신의 가치도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그리고, 항상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성공하는 사람들은 존재하고요. 그들의 존재가, 위기를 기회로 만들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지탄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존감이 낮다는 건, 반대로 자기 가치는 높다는 말인 셈이죠. 자존감이 떨어져 힘들다면, 적어도 지금 느끼는 자신보다는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BL에 나오는 '자낮수'는, 잘난 공이 가지지 못하고, 공 주변에서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귀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음에도 스스로는 모르고 있어요. 공이 그것을 발견하고, 알려주고, 사랑해 주는 것으로 자낮수의 인생을 달라집니다. 신데렐라랑은 달라요. 마법사는 필요 없고, 왕자만 있거든요.
이 시대가 자낮수를 필요로 하는 걸까요? 그럼 자낮수의 '자낮'보다는 결국, 마침내, 파이널리, 그 자낮수가 도달한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였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BLer로서, 확신하지면, 그 '결과'는 이미 자낮수에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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