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BLYNUE 블리뉴
출간일: 2020.05.26
분량: 본편 3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유호가 블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손이 유호의 손바닥에 닿았다. 단숨에 블린을 일으킨 유호는 블린의 왼손 약지에 있는 반지를 빼내었다. 블린의 눈에 죄책감이 짙게 물들었다. 반지는 휙 던져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잡으러 갈 새도 없이. 블린의 몸이 침대에 앉혀졌다. 유호는 블린의 앞에 서서 어깨를 꽉 잡았다. 블린은 허리를 반듯하게 세워 유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옷은 직접 벗으세요."
블린은 머뭇거렸다. 차마 거기까진 못하겠는지, 손끝이 덜덜 떨렸다. 땀이 손바닥에 배어 자꾸 미끄러졌다. 용서를 빌겠다고 나선 주제에, 제 주제를 모르는 블린의 턱을 유호가 들어 올렸다. 유호의 눈을 마주한 블린은 당황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벗기면, 그거 못 입으실 겁니다."
유호의 눈이 음험하게 반짝였다. 블린이 입을 꾹 다물고, 단추를 떨리는 손으로 풀었다. 유호는 탄탄하게 짜인 어깨 근육을 매만지며 다정하게 말했다.
"로즈하한테 들키면 미안하잖아요. 가릴 게 필요할 테니까, 옷은 그대로 가져가세요."
point 2 줄거리
기: 왕국 북부 변방 지키는 군인 블린 윈체는, 어느 날 설원에 버려진 아이를 발견한다. 아들 마로가 떠오른 블린은 지나치지 못하고, 그 아이를 데려와 '로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아들처럼 키운다. 로엘은 천사 같은 외모로 블린바라기가 되어, 블린의 가족들에게 녹아든다. 한편, 용의 나라인 제국은 내전이 터지자 황자들을 주변국으로 대피시키고, 그 과정에서 후계자인 유호가 실종된다. 그는 블린의 이복동생이자, 왕국 공주인 이엘리아의 정혼자였다.
승: 그 후 5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날 블린의 집에 블린의 옛 동료 앨런이 찾아와 로엘의 친모라는 알리제프 부인을 소개시켜준다. 로엘은 알리제프 부인을 엄마라 불렀고, 그녀는 블린에게 실종경위를 설명했다. 로엘은 정든 블린가를 떠나고, 다시 10년이 지났다. 차일피일 미루던 이엘리아의 결혼은 드디어 성사되고, 블린은 이엘리아의 호위가 되어 제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성한 로엘을 만난다. 그가 바로 제국의 황자인 유호였다.
전: 유호는 블린을 격하게 반가워하며, 온 몸으로 치댄다. 이엘리아와 블린은 모두 당황하지만, 곧 제국의 주인이 될 유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반면, 유호는 블린의 가족들도 제국으로 초대해, 그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과 즉위식을 함께 치른다. 하지만, 곧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 이엘리아는 황제 시해로, 마로는 황실 보물을 절도로, 사형에 처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유호는 그들의 사면을 대가로 블린에게 반려가 될 것을 요구한다.
결: 블린은 유호의 침실에 반감금되어 정사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블린은 이 모든 것이 유호의 계략이었으며, 제국과 왕국은 각각의 사정으로 블린의 희생을 방조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블린의 가족과 동료는 블린을 구조하려 한다. 그리고 성공 할 뻔 했지만, 결국 블린은 딸을 살리기 위해 유호와 각인을 맺은채 제국으로 돌아온다. 마침내 목표한 바를 이룬 유호는, 언젠가 반드시 블린이 자신을 좋아해 줄 것이라 믿으며, 느긋하게 그만의 신혼을 즐긴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NTR
NTR... BL의 대표적인 지뢰 중 하나죠. '네토라레'라는 일본어의 약자인데, '자다'라는 뜻의 '네루'와 '얻다'라는 뜻에 '토루'의 합성어인 '네토루'의 피동형입니다. '자서 얻었다.' 정도 될까요? 당하는 입장에서는 '내 애인이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빼앗긴 상황'일 테고, 하는 입장에서는 '짝 있는 상대랑 자서 빼앗는 상황'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듯합니다. 막장의 향기가 나죠? 일본 성인 게임에서 나온 말이라 그래요.
뭔가 애로애로하지만 백치 같은 히로인과 주인공 사이에 'NTR남'이 나타나 성적 흥미로 갈취하는, 바람만 불어도 팬티가 보이고 수시로 얼굴 붉히는, 전형적인 남성 판타지의 소산이었죠. 물론, 'NTR여'도 있습니다. 빼앗기곤 못 살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역NTR도 있고요. 적용되는 컨텐츠가 많아지면서, 쓰임도 다양해지는 듯합니다. 심지어 애인을 뺏기는 내용만 있어도 키워드에 NTR이 뜨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어쩄든, 한국에서는 NTR을 '배우자'가 있는 사람을 빼았을 때 주로 쓰는 듯 해요. 장르소설에서는 자주 등장할 것 같은 자극적인 소재지만, 의외로 BL에서 흔치 않습니다. 삼각관계, 스와핑, 다공일수나 집단난교보다도, 제대로 된 NTR이 훨씬 드물어 보여요. 남성들은 NTR을 '로망'으로, 여자들은 NTR을 '분노'로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광염'은 특별해 보였어요. BL을 잘 보면 모럴리스한 피폐나 하드코어조차도, 행복한 가정을 파탄 내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배우자가 죽거나, 별거 중이거나, 정략적 혼인 관계거나,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중이거나, 심지어 두 집 살림을 하는 경우도 '수'의 갈취하기보다는 '공'의 욕심인 경우가 많아요. 완벽하게 잘 사는 부부 사이에 NTR남이 나타나, 선 섹스 후 갈취는.... 분명, 지뢰라 여겨 질 만한 불편함이 있죠.
블린의 가족은 이상적었어요. 블린은 아내 로즈하를 틈날 때마다 무릎에 앉히고, 옆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아 당기며, 부대로 찾아오는 날이면 언 손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줬어요. 군인인 블린은 딱딱하고 기교 없는 남자였지만, 집에서만큼은 로맨틱한 남편이었고, 자상한 아버지였죠. 왕의 사생아로 태어나 왕실에서 부정 당한 채 군인으로서 살아야 했지만, 애정을 갈구하는 적통의 공주 이엘리아의 따뜻한 오빠가 되어주기도 하고요. 가족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블린이었기에, 협박의 수단도 당연히 '가족'이었어요.
블린은 여동생 이엘리아와 아들 마로를 살리기 위해, 인질이 되어 홀로 유호의 침실에 갇힙니다. 여기까지는 자주 보는 설정이지만, 신선한 점은 블린이 바로 이런 가족들에 의해 구출된다는 거예요. 이엘리아는 시간을 벌기 위해 유호와 독이 든 와인을 나누어 마시고, 주부에게 총잡이로 진화한 로즈하는 아이들과 함께 집을 떠납니다. 블린의 동료들 역시 고국을 버리고, 오로지 블린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요. 끈끈한 가족애와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블린 구조대는 거의 성공하는 듯하지만, 말도 안 되는 유호의 치트키에 좌초됩니다.
그 치트키도 가관입니다. 제국은 4마리의 용이 건국한 나라였어요. 하지만, 그 용들은 권력을 나누어 가지고 싶지 않았고, 마력을 늘리기 위해 인간들을 죽이다 보니, 인간 제물이 마르는 사태에 직면합니다. 용들은 살기 위해 인간이 꼭 필요했고, 결국 영혼의 반을 인간 반려와 나누어 가지는 '각인'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기로 해요. 최소한의 마력만 근근이 유지하면서요. 유호의 어머니는 독을 먹고 쓰러진 아들을 살리기 위해, 유호를 완전한 용으로 만들려 합니다. 그 대가는 왕국이 내 놓은 1만의 목숨이었죠. 유호는 후다닥 '그 일'을 해치우고, 부활(?)하여 블린과 그의 가족 앞에 등장합니다.
블린은 가족을 살리기 위해 유호와 반려 각인을 맺지만, 유호에게 고분고분 해지지 않습니다. 유호는 5살 때, 죽어가는 자신을 구해준 블린과 각인을 맺었어요. 용은 각인을 한 단 한사람과만 반려가 될 수 있고, 끝끝내 그 반려가 각인을 거부한다면 죽고 맙니다. 이것이 NTR남이 될 수밖에 없었던 유호의 변명일지는 모르겠지만, 죽더라도 블린을 로즈하에게 보내지는 않겠다는 유호를 보면, 결국 생사보다는 블린에 대한 독점욕이 우선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다만, 이전 리뷰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듯이, '광염'은 '역키잡'의 배덕함도, '피폐물'에 빻빻함도... 좀 애매합니다. '수'가 정신적 굴복 상태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공에게 날이 서 있습니다. 심지어 외전까지도요. 유호는 블린을 빼앗는 것엔 전력을 다하지만, 블린의 감정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고, 긴 시간 치밀하게 공들였던지만, 목표도 '블린과의 각인' 결론도 '블린과의 각인' 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유아르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유년기를 정말 사랑스럽게 묘사하세요. 이런 몽글몽글한 부자의 시간은, 극적인 관계 반전과 대비될 때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사랑스러웠던 네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어! 라든가, 그렇게 사랑해 주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변하세요!라고 말이죠. 하지만, '광염'에서는 '어떻게 이렇게 변하니!'라고 외치는 사람은 '수'가 아니라 '수의 가족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 희생은 가족들이 하고, 블린은 한거 '실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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