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비욘드

출간일: 2017.01.13

분량: 본편 3권

 

 

 

 

 

 

 

 

point 1 책갈피

"감정이 깊어지면 후에 겪을 괴로움과 상실감도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깊이 빠져드는 걸 경계하게 되는 법이다. 여유가 생기고 현명해지는 거라고들 하지만 실상은 그저 겁이 많아지는 것뿐이야."

잠시 말을 끊은 태해랑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일단 빠지고 나면 절대 물러서지 않지. 내 인생에 다시 이런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될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못할 짓이 없어진다."

point 2 줄거리

기: 정복왕조 현은 소국인 아라국을 멸망시키며, 아라인들은 비참한 처지에 내몰린다. 그중 역경을 딛고 성공한 아라인 중, 공녀로 받혀져 태후가 된 흔씨와 무역으로 부상이 된 란씨가 있었다. 란씨는 고아가 된 아라인 이사야를 데려와 키우고, 자색 눈을 가진 미인으로 자란 이사야는 황후의 오라비인 타이지 타무르 눈에 든다. 타무르는 란가를 겁박하고, 이사야는 타무르에게 자신을 판다. 그리고, 1년간 이사야는 황제 하슬라의 대체품으로 타무르에게 안긴다.

승: 흑발과 자색 눈을 지닌, 잔혹하고 변덕스러운 황제 하슬라를 사랑한 타무르는, 똑같은 얼굴의 이사야를 다정하게 대해준다. 그 사실을 알고도 이사야는 타무르를 연모한다. 그러던 중 이사야의 이야기를 들은 하슬라는 이사야를 불러 모욕을 주고, 타무르는 묵인한다. 상처 입어 울고 있는 이시야는, 태해랑을 타무르로 착각하고 안긴 채 쓰러진다. 한편, 타무르를 이용해 온 하슬라는 이사야에게 흥미를 느끼고, 낙인을 찍은 채 자신의 대역으로 활용한다.

전: 그러던 어느 날 이사야는 하슬라가 란가와 자신을 도륙할 것이라는 급보를 받는다. 이사야는 황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알게 된 하슬라는 관련인들을 제거하려 한 것이었다. 이사야는 란가를 지키기 위해, 하슬라를 죽이고 황제가 되려 한다. 그리고, 뒤늦게 이사야에 대한 연정을 깨달은 타무르가 하슬라를 죽이고 이사야를 돕는다. 하지만, 이사야는 타무르를 용서하지 못했고, 자신에게 구애하는 태해랑을 이용해 타무르를 견제하려 한다.

결: 태해랑과 타무르에게 공평히 몸을 나누면서, 후궁전에 발을 끊은 황제를 려귀비는 의심한다. 려귀비는 자신의 가문인 아젠타의 힘을 빌려, 타무르, 태해랑, 황제를 이간질해 분열시키고, 반정을 일으켜 자신의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한다. 하지만, 이사야는 이미 이를 간파하고 있었고, 모반은 실패로 끝난다. 타무르는 안정적인 황권을 확립한 이사야가 태해랑에게 고백하는 모습을 보며, 이사야를 떠나려 한다. 하지만, 이사야는 타무르를 놓지 못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아픈 뿌리

뜅굴이님의 소설은, 좋은 말로 군더더기가 없고 나쁜 말로 생략이 많습니다. '어떻게'라는 부분이 매우 간소하고, 메인 갈등이외에 잔 갈등도 거의 없습니다. 얼기설기 얽혀 있는 다사다난한 궁중물을 원하신다면, 만족도가 높지 않을 수 있어요. 이런 나쁜 짓을 했고, 그래서 위기가 생겼으며, 황제는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문제는 잘 해결되었다!를 좀 길게 쓴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엉성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암투나 정쟁을 심플한 뼈대로 세워두고, 그 위에 화려한 인물들을 장식해 놓은 느낌이랄까요. 선택과 집중! 하지만, 그 선택과 집중된 부분 이외의 요소들을 보는 편이라면, 아쉬움은 있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캐릭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재미있게 봤습니다.

제일 매력적인 인물은 타무르였습니다. 이사야 일 듯도 하지만, 그보다는 저에겐 타무르!였습니다. 타무르는 과묵한 외골수예요. 무재인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은 훌륭한 무인이었고, 황후의 오라비이자 2황자의 외숙이었죠. 명실상부 최고의 명문가, 짐승 같은 몸에 미형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 행보만큼은 늘 한걸음 물러나 있었습니다. 바로, 황제인 하슬라를 사랑했기 때문이죠. 그는 탄탄한 배경을 내려놓고, 폭군의 사냥개로 사는 것을 선택합니다.

하슬라는 아라인 흔씨의 소생으로, 아라인다운 작은 체구, 아름다운 얼굴, 고운 흑발과 자색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슬라에게 이런 외모는 멸망한 나라의 흔적이었고, 공녀로 태후에 오른 어머니의 존재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슬라는 변덕쟁이 폭군으로 잔인한 성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뒤처리는 타무르의 몫이었죠. 필요가 있다면 죽이지 않는다. 그만큼의 가치인 것을 알면서도, 한길밖에 모르는 타무르는 기꺼이 하슬라에게 이용당해 줍니다.

결코 가질 수 없는 존재, 그렇게 생각했던 하슬라와 꼭 닮은 이사야를 발견하죠. 타무르는 협상을 모르는 남자였어요. 그리고, 이사야는 장사꾼이었죠. 타무르는 란가를 멸문시키겠다고 협박 하고, 이사야는 란가를 지키기 위해 돈을 받고 자신을 팔아요. 타무르는 이사야를 소중히 대해줍니다. 하지만, 안을 때면 언제나 하슬라의 이름을 부르죠. 거금을 받고 내어 준 몸이니, 연심이 깊어져도 이사야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다만, 속은 점점 곯아갔죠.

하슬라는 타무르가 그토록 아낀다는 이사야에게 흥미를 느낍니다. 그리고, 이사야를 불러내고, 타무르의 진심을 알게 돼요. 하슬라는 자신이 싫어하는 아라인의 특징을 빼다 박은 이사야에게 모욕을 줍니다. 그리고 하슬라의 잔인함을 알고 있는 타무르는 이사야를 살리기 위해 입을 닫아요. 하슬라의 대체품으로 산 것은 '화대'의 대가라지만,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은 '연심'의 대가였어요. 설상가상 황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타무르는, 상처 입은 이사야를 황제에게 바치기 까지 합니다. 그렇게 이사야는 사랑하는 남자에 의해 궁에 갇히고, 노예처럼 몸에 낙인이 찍히죠.

타무르는 하슬라를 사랑했고, 이사야를 하슬라의 대신으로 삼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슬라와 이사야는 만났고, 하슬라는 이사야를 괴롭힙니다. 그 모습을 보며, 미묘한 틈이 생겨요. 둔한 남자는 그 균열의 답을 찾지 못하고, 고통을 토하는 이사야에게 무언의 긍정을 보냅니다. 그리고, 늦된 남자의 깨우침은 이사야와 타무르를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만들었죠. 타무르는 이사야에게 구애하고, 용서를 구하고, 심지어 하슬라를 죽이기까지 하지만, 이사야는 타무르를 믿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타무르를 견제 할 수 있는 태해랑을 곁에 둡니다. 타무르는 이사야를 위해 짝사랑 상대를 죽이고, 가족 역시 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으면서도 이사야를 충실히 지켜내죠. 수완 좋고, 말 재주 있는 태해랑이 이사야를 녹여 가졌다면, 타무르는 깨지고 부서지고 나서야 이사야 곁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이사야는 타무르는 빼 낼 수 없이 깊이 박힌 가시라고 말하고, 타무르는 진심으로 기꺼워하죠.

부상의 막내아들, 혹은 사위가 되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사야... 하지만, 타무르에 눈에 띄었다는 것으로, 운명은 배배 꼬여 버립니다. 친모가 숨겨 온 자신의 혈통을 알게 되고, 죽지 않기 위해서 가짜 황제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천성이 장사꾼인 이사야는, 현명하게 위기를 모면하지만, 불안과 불행의 나날을 견뎌내야만 했어요. 비록 타무르가 욕심낸 것은 이사야 하나뿐이었지만, 타무르는 이사야에게 애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죠.

다공일수에서, 유혹수가 아니라면 칼자루는 공들이 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여왕수가 아님에도 정치적으로 두 공을 이용하고, 감정적으로 통제하는 노련함을 보입니다. 두 사람을 저울질해서 원하는 행동을 유도하면서도, '애정'이라는 보상도 적절히 분배해 주죠. 이 보수적인 무인 남자들은, 그렇게 이사야를 나누어 가지게 됩니다.

이사야는 황궁을 내려다보며, 금빛 밀림 속에서 자신을 황제로 지탱해 주는 두 뿌리의 존재를 생각합니다. 다정한 뿌리 태해랑, 아픈 뿌리 타무르... 타무르는 이사야에게 상처 없는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태해랑을 부러워하고, 태해랑은 자신이 모르는 이사야와 타무르만의 시간을 인정해요. 화려한 잎사귀를 자랑하는 나무는, 어둡고 습기진 흙 속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타무르가 이렇게까지 개발싸개가 되어야 하는가? 타무르는 억울할지 모르겠지만, 원래 인생은 타이밍이니까요. 그래도, 아프게라도 이사야의 한 뿌리가 될 수 있었으니, 결국은 해피엔딩이라고 봐야겠죠? 물론, 지분은 1/2이지만요.

※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 리뷰

 

 

2021/01/06 - [BL 소설] - [시대물/동양풍] 귀비장군 - 뜅굴이

 

[시대물/동양풍] 귀비장군 - 뜅굴이

​ ​ ​ ​ ​ point 1 책갈피 ​ ​ "아버님께서는 항시 전장에 계셔 길게 뵌 일이 없으나, 집에 돌아오면 꼭 저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항상 무인은 자신을 쓸 주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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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7 - [BL 소설] - [인외존재/무협물/달달물] 소백전 - 뜅굴이

 

[인외존재/무협물/달달물] 소백전 - 뜅굴이

출판사: 비하인드 출간일: 2016.09.21 분량: 본편 2권 + 외전 1권 ​ ​ ​ ​ ​ point 1 책갈피 ​ ​ " 소백아. 소백아. 숲에 돌아가지 말고 나랑 평생 같이 살자. 응?" ​ 무흔이 소백의 귓가에 속삭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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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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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필연매니지먼트

출간일: 2020.11.01

분량: 본편 3권

 

 

 

 

 

 

 

point 1 책갈피

" 주인아, 문자를 너무 맹신하지마. 우린 단편적인 마음의 한 가닥만 읽을 수 있을 뿐이야. 문자를 바탕으로 타인의 마음을 짐작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각색될 수 있다는 소리고."

지친듯 잠시 소파에 주저앉은 남자는, 삼십 대 중후반쯤으로 보였던 얼굴이 일순간 쉰 살은 넘은 것처럼 느껴졌다.

"향현사...... 그게 저 밖에서 우리를 부르는 용어야."

"네?"

"향현사들은 사이코메트리스트보다 훨씬 드물거든. 우린 'snare'로 불리기도 해."

새로운 지식은 늘 그렇듯 놀라움을 불러온다.

"한국말로는 향현이란 뜻을 가졌지. 죽은 지 수십 년은 더 됐지만 영국 수사관으로 알려진 한 남자가 있어. 그 남자도 우리와 같이 문자를 읽을 수 있었고, 그는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서 그렇게 물렀어. 'snare'라고. 그건 향현이라는 뜻과 더불어 덫이나 올가미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 주인이 네가 보는 문자도 참 아름답지?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문자는 아름다운 음악을 울리는 향현줄 같은 게 아니라 덫이기도 해.

point 2 줄거리

기: 이주인은 강한 사념을 형상화한 글자를 볼 수 있다. 어느 날, 주인이 운영하는 조용한 시골 카페로 원두로 둔갑한 마약 K3 오배송 된다. 폭력조직 사파의 이사, 묵야는 그 K3를 회수하기 위해 경찰인척 주인의 카페를 방문하고, 무채색의 세계에 오색빛을 뿜어내는 주인에게 한눈에 반한다. 주인 역시 글자를 읽을 수 없는 묵야에게 관심이 생기고, 둘의 관계는 급진전된다. 주인은 서울로 올라와 형사 태형의 수사를 도우며, 사파의 전무가 된 동생 주율을 만난다.

승: 주율 역시 주인처럼 글자를 볼 수 있었다. 과거 두 사람은 그 이유로 친부에게 학대를 당해 왔고, 동시에 주율은 주인의 사랑을 갈구했지만 주인은 주율을 동생으로만 대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고로 부모가 죽고, 주율은 잠적했다. 한편, 주인이 시골로 내려간 사이, 태형의 의붓동생이자 사이코메트리스트인 유진은 주인의 집에 살고 있었고, 돌아온 주인과 주율은 유진과 어색한 동거를 시작한다. K3수사를 돕는 주인은, 번번히 묵야의 흔적을 발견한다.

전: 묵야는 주인에게 거짓이 없었고, 주인은 '읽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묵야에게 안식을 느낀다. 주인은 묵야와의 신뢰가 쌓이는 반면, 점점 변해가는 태형의 모습를 보며 실망한다. 결국 주인은 태형에게 수사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한다. 태형은 글자로 주인을 힐난하고, 주인은 깊은 상처 입는다. 한편, 과거 친부의 학대 트리거가 되었던 '이성일'이 나타난다. 인터폴인 성일은 친부의 동생이었고, 친모의 연인이었으며, 친부를 사랑한 마음을 접기 위해 도망쳤었다.

결: 성일은 주인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K3 유통책 유진을 알아보고, 놀란 주인은 태형과 묵야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 하지만, 실제 배후인 태형이 보낸 가출 청소년들에게 납치당한다. 그리고 K3 사건 이면에, 묵야를 실각시키려는 사이남과 태형의 공모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다행히 묵야는 주인을 구하고, 사건을 정리한다. 한편, 성일의 비극을 목격한 주인은 단호한 결단을 내리고, 그 결정 따르기로한 주율은 집을 떠난다. 주인은 다시 시골 카페로 내려간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말'의 굴레

힘들면, '힘들다.'라는 말 해야할까? 언젠가 이런 생뚱맞은 주제로 지인들과 대화 한 적 있습니다. 한 미식축구 감독은, '남에게 힘들다고 말하면, 그들 중 98%는 관심이 없을 것이고 2%는 고소해 할 것이다. 그러니까 타인에게 힘들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확실히, 입버릇 처럼 '힘들다.'고 하는 사람과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 집니다. 피하고 싶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공연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고, 뒤늦게 죄책감이 되어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죠. 무엇보다, 속이 곪아요.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힘들다.'라는 '말'에는 '힘'이 있다는 겁니다.

채팔이님의 소설은, 세상을 비틀어, 세상을 직시하는 작품들이 많아요. 비현실적인 설정들이, 되려 신랄하게 현실의 민낯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말이에요. '향현문자' 역시 그렇습니다.

강한 사념은 문자로 형상화 되어 스스로 '의지'를 가집니다. 머리에서 '뽕' 생겨난 문자들은, 자신만의 색과 기운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비슷한 기운을 가진 글자들끼리 서로 끌어 당깁니다. 가령, '자살'은 어둡고 독한 기운을 가지고 태어나서, '절망' '실패' 같은 단어들과 모입니다. 뭉칠수록 기운은 강해지고, 그 글자들은 공중을 떠다니다 '자살'을 생각하는 다른 사람에게 들러붙어요. 반대로, 밝은 기운을 타고난 단어는 주변의 사람들을 유쾌하게 만들어 줍니다. 상처가 나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태어난 '후시딘'은, 주인의 아픈 부위를 찾아가곤 합니다.

슬픈것은, 독기를 머금은 글자는 좋은 기운의 글자를 먹어 치운다는거에요. 글자에 있어서는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빛을 잠식시키는 거죠.

글자는 그 문자에 반응하는 사람의 '의지' 역시 반영합니다. 주율의 방에 가득 찬 단어들은 주인에게는 독이 돼요. 주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글자들로 인해 피를 토하죠. 주율은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에 당당하고, 주인은 주율의 사랑을 집착과 광기라고 느끼니까요. 문자에 담긴 사념은 같지만, 두 사람에게 문자의 기운은 다른 셈이죠.

또, 글자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글자를 보관하거나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기운을 모아 놓으면 그 장소는 밝고 즐거운 기운이 만연하고, 나쁜 기운의 글자를 파괴하면 독기도 함께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파괴한 사람에게 고스라니 돌아옵니다. 안방을 가득 매운 '이성일'이라는 글자를 모두 파괴한 이성일은, 업보와 같은 고통을 스스로 감내합니다.

그리고, 문자를 많이 생성하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주로, 자아가 약할수록 문자가 많이 보입니다. 불안한 마음에 머릿속으로 많은 말들을 하기 때문이죠. 반면에,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은 문자를 잘 만들지 않아요. 마치 묵야처럼요. 또, 진심과 다른 문자를 생성할 수도 있고, 회피할 수도 있어요. 형사 태형은 주인을 속이기 위해 문자를 통제하고, 주인은 말과 문자가 동일한 태형이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려요. 그리고 그런 맹신이 비극의 단초를 제공하죠.

사이코메트리나 독심술, 마인드 컨트롤 같은 초능력을 다룬 작품은 많습니다. 그리고, 이 '진실을 보는 무기'는 주인공에게 불행한 비밀을 무차별 노출시키기도, 거대한 사건을 풀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자를 읽는 '향현사'의 초능력은 좀 다릅니다. 그저, 그 순간, 그 사람의 '단편'을 볼 뿐이에요. 하지만,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문자의 굴레'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마치,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면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처럼요. 향현사였던 친부는, 부인에게서 넘쳐흐르는 '이성일'이라는 글자를 평생 보지만, 주율이 그 단어를 말하고 나서야 '이성일'이라는 존재를 현실로 끌어내요. 안개처럼 흐리기만 한 실체가, 형태를 굳혀 '진실'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이예요.

나의 기억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문자로 정의되는 순간 '사실'이 돼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주 많은 순간 '기억'이 유일한 '진실'인 마냥 상처받고 움츠려 듭니다. 평생 문자의 속성을 질리도록 접해 온 주인이, 그 문자의 굴레에 갇혀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처럼요. 문자가 의지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 문자를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 역시, 그 문자를 그저 믿고 싶은 의지를 가지기 때문일까요?

'항연 문자'는 채팔이님의 위트 있는 서사, 금사빠 공수의 풋풋한 연애, 주율 유진의 티카타카로 유쾌하게 전개됩니다. 하지만, 주율이 주인을 이성을 잃은채 반복적으로 폭행하거나 강간하려는 장면, 가출 청소년들이 주인에게 강제로 오럴를 시키고 사진 찍는 장면을, 매우 건조한 시선으로 보여주기도 하죠. 또, 불어 선생님과의 일화나, 살인사건이 되어버린 치정사건은, 주인이 피하든 피하지 않든, 문자를 읽는 능력은 모두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냉소적 결말을 던지기도 합니다.

'향현문자'는 초능력으로 수사를 돕던 주인공이, 가장 믿었던 형사에게 배신당하는 단순한 사건물입니다. 또, 사패 소패 조폭의 첫사랑과 갑자기 키스를 하며 사귀자고 해도 오픈 마인드고 받아 주는 쿨한 연애관 등 좀 잉?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향현문자'의 재미가 비단, 이런 '줄거리'에만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중이나 경중과 무관하게, 등장인물 모두가 결이 다른 메세지를 전해 주고 있고, 충돌 없는 독특한 설정들이 한걸음 물러나 현생을 관찰하게 해주죠. 정말... 채팔이님... 당신은!!!

※ 동일 작가의 다른 작품 리뷰

 

2020/11/03 - [BL 소설] - [SF물/애절물/시리어스물] 레인보우 시티(레보시) - 채팔이

 

[SF물/애절물/시리어스물] 레인보우 시티(레보시) - 채팔이

출판사: symphonic 출간일: 2019.12.09 분량: 본편 5권 + 외전 1권 ​ ​ ​ ​ ​ point 1 책갈피 ​ ​ 그들은 틀렸다. 고통은 진화의 시작이 아니다. ​ 모든 바이러스에서 자유롭다고 한 들 그것이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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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int 1 책갈피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어떤 귀족들. 어떤 평민들. 헤베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이들.

어떤 반골 기질의 일종인지, 소문은 황제가 헤베 뮨을 북국으로 유배 보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시작되었다. 일부러 소문을 널리 퍼뜨려 헤베 뮨의 이미지를 쇄신하겠다는 거창한 목적도 없이. 자연이 스스로 정화하듯이 그렇게 퍼져나간 것이었다.

'흑마법사로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그런 소문이나 퍼졌으면 좋겠어.'

언젠가 헤베가 퍼지길 바랐던 소문과는 정반대였다.

헤베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으나 저택에만 머물러 실감이 나지 않는지 반응은 미미했다. 반대로 테이든은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울컥할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다. 같이 빵을 만들다가도 눈시울을 붉히고, 정원을 산책하다가도 콧등이 빨개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헤베는 매우 놀랐다.

테이든이 그렇게 상처받은 줄 몰랐던 것이다.

'내가 너만큼 이기적이지는 않으니 말이다...'

헤게르미의 말이 옳았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

헤베는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든 말든, 타락한 배신자라고 부르든 얼마나 증오하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상관없어하는 건 아주 이기적인 행동이었고,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누군가 나를 아끼는 이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타인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면서 진심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했다. 결국 중요했던 건 자신 안의 감정일 뿐이었다.

'나는 이기적이었어.'

인정하고 나니 홀가분한 동시에 무거워졌다.

죄책감을 자극하는 부담스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헤베를 세상에 붙들게 하는 다정한 무게였다.

point 2 줄거리

기: 비센티아는 마물과의 전쟁으로 위기를 맞는다. 그때 나타난 최연소 대 마법사 헤베 뮨, 이어 헤게르미의 신탁을 받은 초월자 테이튼은 전쟁은 마무리 짓고 인간들에게 승리를 선물한다. 하지만, 종전 전 헤베 문은 돌연 흑마법을 받아들이고, 타락자로 지탄받으며, 흑마법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 후 1년 반 뒤 헤게르미는 헤베를 깨운다. 헤베 사후 헤베를 사랑한 테이튼은 세계를 멸망시켰고, 헤베는 회귀해 테이튼이 헤베를 사랑하지 않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승: 회귀한 헤베는 테이튼에게 매정하게 굴지만 그런 헤베의 태도는 너무 어색했다. 헤베의 눈치는 뮨치만큼도 없었고, 테이튼의 머리는 심하게 좋았으며, 뮨의 친위대는 헤베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헤베의 이상 변화를 감지한다. 과거 헤베는 뛰어난 재능으로 여덟 살 어린 나이 참전하고, 선황과 궁사는 헤베를 정신적으로 학대하며 전쟁터로 내몰았다. 덕분에 승리는 거뒀지만, 헤베는 극도의 피해 망상과 자기혐오에 시달리며, 정상적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전: 한편, 헤베는 갖은 노력을 다해도 테이든의 사랑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면, 테이든과 뮨의 친위대는 헤베의 행동을 유도하며, 헤베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파헤친다. 헤베는 회귀 전 피해 망상과 자기혐오로 오해하고 있는 친위대나 테이든에 대해 진실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왜곡된 착각을 바로잡은 헤베는, 테이든과 친위대에게 흑마법으로 인해 곧 죽는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즈음 테이든은 헤베의 회귀 사실을 짐작한다.

결: 헤베는 자기 사후 세상을 멸망시키지말라고 설득하지만, 그들은 무시하고 헤베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럼 모습을 보며, 헤베는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였던 회귀 전과 달리, 살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예정된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절망에 빠지기 직전, 헤베가 기억상실 마법을 걸었던 의원이자 전 부궁사였던 하베트가 나타나 중화제를 건네준다. 살아난 헤베는 테이든에게 흑마법을 받아들인 이유와 죄책감을 고백한다. 모두들 행복해진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불행은 뮨치만큼만 있고, 행복은 테친놈처럼 와라!

 

소림님의 소설은 긴장하고 읽어야 합니다. 깜찍한 먕먕이, 귀여운 헤베, 개그콤비 같은 테이든과 친위대를 보며 태평하게 웃다가는, 감동 크러쉬에 심장 직격탄을 맞습니다. 방어 가드를 올리지 않고 맞는 훅은 제법 아려요. 하지만,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뮨의 그늘'은 헤베 뮨에게 빚을 진 세계가, 온힘을 다해 합심하여 그에게 빚을 갚는 내용이니까요. 신도, 황제도, 각각의 사람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죠.

 

- 뮨치: '헤베 뮨의 눈치'의 줄임말; 동의어-거의 없음: 활용 - '눈치가 뮨치만큼 있네.' '이번 달 잔고가 뮨치만큼 남았다' '님 양심이 뮨치네'

- 테친놈: '테이든 미친놈'의 줄임말: 동의어-세상 멸망급 사랑꾼, 다른 동의어-본태성 스토커; 활용 - '이런 테친놈 같으니라고!(칭찬)' '이 사랑은 정말 테친놈급이야!(칭찬)'

 

'뮨의 그늘'은 헤베의 죽음과 함께 시작합니다. 헤게르미는 마지막힘을 다해 헤베를 회귀시킵니다. 그리고 헤베는 주어진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테이든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도록 만들어야하죠. 하지만, 헤베 뮨의 눈치는 뮨치였어요. 테이든이 사랑하는 줄도 몰랐는데, 사랑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을 알 리가 없죠. 하지만 그런 헛된 노력은, 헤베가 과대망상과 자격지심으로 알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키가 돼요. 이것이 헤게르미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죽음조차 희생에 불과했던, 대마법사 헤베 뮨에게 빚을 갚는 방법이었어요.

 

오랜 전쟁으로 인간들은 수세에 몰리고, 매일 전장에서 목숨을 잃는 자들 역시 많아집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한 전쟁터, 그 지리멸렬한 악몽을 끝내 줄 대마법사의 등장에 모두가 환호할 수밖에 없었죠. 다만, 그 대마법사의 나이가 고작 8살이었다는 것만 빼면요.

 

선황과 궁사는 쓰레기가 맞습니다. 어린 헤베를 정서적으로 학대하며, 정신통제를 일삼죠. 그 덕분에 무시무시한 전쟁터에서 어린아이는 도망칠 수 없었고, 부작용으로 끔찍한 피해 망상과 자기혐오에 빠져요. 그들은 헤베에게 전장을 '일상'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칭찬도 보상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책임감과 죄책감을 지우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지만, 헤베에겐 상처를 치유하는 최소한의 휴식조차 '나 때문에 사람들이 죽은 것이다.'라는 자책이 되고 말아요. 헤베는 뼈가 부러지는 상처 입어도, 쉬지 않고 전장에 나갑니다.

 

'한 개인이 지독하게 불행해지면, 세상이 평화로워질 수 있다.' 지배자는 그 선택을 안 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 개인이 순수한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말이에요. 그래서, 테이든과 뮨의 친위대가 등장합니다. 세상의 평화나 다수의 행복 따위는 조금도 관심 없는, 오로지 헤베 뮨을 위해 움직이는, 헤베 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요. 하지만, 회귀 전 헤베는 그들의 사랑을 곡해하고 인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싫어하고 몰아내려 한다고 생각하죠. 그들이 보여준 올곧은 진실은, 전쟁후울증으로 망가진 헤베의 눈에는 깨진 잔상처럼 흩어지기만 했어요.

 

천재 대마법사 헤베 뮨이 그토록 연구해도 발견하지 못한, 중화제가 어떻게 하베트에 의해 짜잔! 하고 등장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세상이 헤베 뮨에게 빚을 갚는 내용이니까요. 헤베는 회귀를 통해, 선황과 궁사가 헤베에게 씌운 고문과 같았던 편견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마땅히 헤베가 가지고 있었던, 헤베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깨닫죠. 그리고, 헤베가 실패라고 자책했던 작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간호과 보살핌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헤베 뮨은 살고 싶어 한다. 이 간단한 진심 하나를 깨닫습니다.

 

'뮨의 그늘'을 읽으면, 모든 등장인물이 '이기적'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아이러니하죠? 이 이야기 속 전쟁 영웅들은 세상을 구한 '이타적'인물들이 아니던가요? 황제는 뮨의 희생을 알았지만, 보상을 해주면 된다는 합리화로 방치합니다. 테이든은 뮨의 친위대가 헤베의 방황을 보고 분열 할 때, 이를 악용해서 헤베 곁에 남는 유일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뮨의 친위대는 헤베 주변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차단하고, 가득이나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헤베를 독점하려듭니다. 마지막으로 헤베는,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으므로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큰 절망으로 밀어 트리죠.

 

하지만 솔직해지자고요. 사람은 이타적이기보다는 이기적인 존재예요. 다만, 이기적인 것이 '권리'는 아니기에, 이기적으로 구는 것이 합리화되지 않을 뿐이죠. '뮨의 그늘'에 인물들은 모두 이기적이지만, 이타적인 선택을 합니다. 황제는 헤베의 숨은 조력자로 많은 도움을 주고, 테이든과 뮨의 친위대는, 헤베를 살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죠. 헤베는 이제, 자신의 곁을 묵묵히 지켰던 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동화 같은 이야기! 하지만 그늘 없는 빛은 없죠. 본편에서 테이든의 숨겨진 무기는 끝내 빛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면, 15세거든요. 헤베와 테이든은 키스를 하거나, 입을 맞추거나, 숨결을 나누기만 합니다. 네... 키스만해요. 그래서, 외전을 기대했지만... 테이든의 단도는 빛을 보되 독자들은 보지 못합니다. 19세일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또 15세였거든요. 다만, 키스와 뜨밤을 즐기는, 요망한 헤베를 보면... 너는 좋았구나. 나도 좋고싶다... 라는 씁쓸함만 곱씹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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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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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모드

출간일: 2021.04.09

분량: 본편 3권 + 외전 1권

 

point 1 책갈피

그의 고동색 눈동자가 자신만을 가득 담고 있는 연녹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나는 사는 데 대단한 목표가 있진 않았어. 주어진 데서 큰 욕심 없이 적당히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라파엘은 겨우 이 정도 말로도 퍽 속상한 얼굴을 했다.

"네 옆에 있으면 계속 현재 이후의 시간에 대한 기대가 생겨나."

"......"

일그러졌던 미간이 금세 풀리고 눈꺼풀이 깜빡였다. 가을바람이 귓가에 꽂힌 꽃잎을 흔들었다. 놀란 눈으로 멈춰서 있는 라파엘에게 단테가 한 반짝 다가갔다.

"너는 내게 생각보다 더 벅차고 행복한 일이더라."

단테에게도 라파엘만큼 달콤하지는 못하겠지만 고대하던 날에 대한 계획이 있었다. 몇 번이고 먼저 문을 두드려준 후배를 대신해, 이번 고백만큼은 자신이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었다.

"네가 준 것들을 내가 알아챌 때까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point 2 줄거리

기: 특수부대 ODA-133 팀장 단테 베일리는 3개월간 진행된 작전을 마치고, 제도로 돌아와 팀원들과 회포를 푼다. 팀막내 헤인스워스 라파엘의 6개월간의 수습 마지막 날이자 다음날부터 장기 휴가에 돌입하는 팀원들은 취할 때까지 마시고, 단테는 만취한 라파엘을 연회장이 있는 호텔 빈방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둘은 뜨밤을 보낸다. 그 다음날부터 라파엘은 연락 두절되고, 단테가 그런 태도에 실망을 하고 있을 때 폭행 당한 얼굴이 상한 라파엘이 나타난다.

승: 라파엘은 그날 자신이 단테를 강간했다고 판단하고, 자수 전 육군 총사령관인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다 맞았던 것이었다. 단테는 라파엘과 함께 헤인스워스가를 찾아가 강간이 아니었고 화간이었다고 정정하며, 총사령관에게 라파엘 폭행의 부당함을 주장한다. 단테의 그 모습에 헤인스워스가는 단테를 라파엘의 약혼자라고 단정 짓고, 졸지에 단테는 명문 귀족가인 헤인스워스의 사위가 된다. 그리고 라파엘은 숨겨왔던 단테에 대한 연심을 밝힌다.

전: 단테는 라파엘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구애를 받으면서 라파엘의 진심을 느낀다. 단테는 자신의 출신과 라파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라파엘에게 포기를 설득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라파엘의 사랑은 더욱 깊어만 졌고, 우여곡절 끝에 단테 역시 라파엘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던 중 라파엘이 있는 테네시에서 테러가 발생한다. 단테는 그 테러를 진압하며 영웅이 되고, 귀환한 단테와 라파엘의 애절한 모습이 방송을 타며 두 사람 사이는 제국적으로 알려진다.

결: 한편, 사관학교 시절부터 고아인 단테를 무시해 온 데릭슨 에프런의 시기심은 폭발하고, 결국 단테가 자란 성당을 위기에 빠뜨린다.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단테는 데릭슨과 싸우고 징계를 받는다. 그 뒤 라파엘은 데릭슨을 폭행하는 하극상을 저지르고, 제대한다. 단테는 라파엘과 동거를 시작하고, 라파엘은 단테와 같은 재능 있는 아이들을 발굴하고 돕기 위해 헤인스워스 재단 이사로 취임한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Life는 단테 베일리처럼, Love는 헤인스워스 라파엘처럼

'로맨틱 캡틴 달링' 단행본이 나왔습니다. 두둥! 짧았던 크리스마스 외전의 아쉬움을 달래 줄 따끈한 외전과 함께 말이죠. 새로운 외전에서, 어린 신부를 꿈꾸던 라피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 집니다. 단테 베일리는 단테 헤인스워스가 되고, 무시무시한 시동생 11명과의 결투(?)에서 라파엘은 단테를 얻어 내죠. 본편의 방점을 제대로 찍은 외전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대형견공과 우월능력미인수, 울보절륜공과 유혹연상수, 애절과 달달이 적절히 섞인 포근 따뜻 므흣 스토리, 모아이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키워드입니다.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싶은 울보들이 순수하고 올곧게 직진하는 이야기들이죠. 하지만, 제가 모아이님의 소설에서 유독 애정 하는 캐릭터는 이런 댕댕이들보다는 좋은 사람의 표본 같은 강수들입니다. 공에게 사랑과 존경을 한 번에 받는, 정말 만나고 싶은 인간상들이에요. 물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좀 다른 타입의 공수를 다룬 군부물입니다.

단테는 고아예요. 하지만, 성당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자랐고, 80명의 동생들을 가진, 책임감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기도 하죠. 어릴 때부터 뛰어난 신체 기량을 발휘한 단테는, 장학금을 받고 학군단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다수가 귀족층으로 이루어진 제1사관 학교에 차석으로 입학해요. 성격 좋고, 수려한 외모의 단테지만 차별은 피할 수 없었죠. 동생에게 후계자 자리를 밀려 군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기수 선배 데릭슨 에프런은 고아 출신의 평민과 같은 학교 다니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단테를 괴롭힙니다. 그 서러움이 익숙해져, 무감해질 때까지 말이죠.

차별을 받은 사람은 두 가지로 나뉘죠. 내가 받은 차별을 나보다 더 약자에게 대물림하거나, 내가 받은 차별을 반면교사로 삼아 반대로 행동거나 말이에요. 단테는 후자였고, 팀장, 사수, 선배가 되어도 아랫사람에게 친근한 상대가 되어 줍니다. 억울할 법도 하지만, 단테는 요령도 불평도 없이 소신껏 살아갑니다. 약자의 목소리가 묵살되는 군대가 싫었던 라파엘은, 가장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단테의 모습에 반하게 되죠. 그리고, 오랜 군대 생활을 한 총사령관도, 3선 정치인 도시자도, 몸값 비싼 황실 변호사도 그 낯선 정직함에 빠져들어요. 아이러니하게도, 헤인스워스 가족들에게 단테는 신기할 정도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었으니까요.

단테는 월급의 8할을 성당에 가져다주고, 어머님이 없는 상황이 오면 동생들 중 일부를 맡아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단테는 스스로를 '사랑'에는 헌신적일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가벼운 만남만을 이어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라파엘이 좋은 사람일 수록, 더 자신을 많이 사랑 할 수록, 밀어내고 피합니다.  하지만 헤인스워스 패밀리는 단테를 제대로 찜 했고, 오히려 이런 노력들은 개미지옥처럼 단테의 매력에 빠지는 계기만 돼요.

 

결국, 단테는 행복한 항복을 선택합니다. 생각이 많은 단테는, 직진하는 라파엘를 이길 수 없었고, '좋은 사람' 단테는 라파엘은 만나 비로소 '좋은 사랑'을 배우죠.

'로맨틱 캡틴 달링'은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한 군부물은 아닐지 모릅니다. 사건과 갈등은 있지만,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해결 되리라 예상 가능하기도 하고, 시작부터 헤인스워스의 전폭적 지지를 받기 때문에 단테의 고생은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댕댕이가 우리 캡틴을 너무 사랑하게 되면서, 그의 과거 상처를 안타까워하는 것을 골자로 하니까요.

하지만, '로맨틱 캡틴 달링'은 몰입도가 높습니다. 단테와 라파엘이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거든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이죠. 눈이 따뜻한 촉감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퐁실함이지 않을까? 눈부신 순백색의 솜뭉치 같은 포근함이 느껴진달까요. 좋고, 예쁘고, 착하고, 귀엽고, 바른 것 종합세트! 자극적인 매운맛에 쓰린 속을 땃땃하게 댑혀 주는 닭고기 스프 같은 글이죠. 그래서, 구원물이 아님에도 꼭 '힐링물' 키워드를 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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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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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고럼팩토리

출간일: 2020.11.11

분량: 본편 3권

 

 

 

 

 

 

 

 

point 1 책갈피

시동이 사라지고 이화수는 고개를 수그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은월검이 쥐어져 있었다. 마치 평범한 것처럼 무명천으로 둘둘 감싼 그 검은 검집 안에 있어도 검신의 싸늘한 기색을 고스란히 전해 주었다.

정말로 주룡진이 자신을 이용해 죽기를 바랐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그는 단지......

'......음, 나조차도 예상 못 한 일이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아.'

'그러니까 왜?'

'네게 무언가를 요구받는 게 좋아서?'

좋아서.

그 모든 것들이 좋아서 그랬나 보다.

이화수는 그 검을 집어 들고 스르르 일어났다.

point 2 줄거리

기: 화산파 이화영의 유일한 후계자 이화수는 자신을 납치하려는 마교주 주룡진을 피해 달아나지만 실패하고, 천신궁으로 끌려간다. 파천신공을 익힌 주룡진은 천하제일의 무공을 얻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마기를 다스리기 어려워지자, 명문세가나 도가의 자제들을 납치해 겁간하며 양기를 얻어왔던 것이다. 화수 이전에 끌려온 명문세가의 자제들은 죽거나 주룡진의 애첩이 되어 살고 있었다. 한편, 주룡진은 화산파의 봉마주혈로 날뛰는 마기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승: 유용함이 증명 된 화수는 겁간의 위기에 벗어나지만, 주룡진에게 집착하는 당서란에게 시기의 대상이 된다. 화수는 정기적으로 주룡진에게 봉마주혈을 시전하며, 탈출을 위해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런 화수에게 주룡진은 자신의 보검 은월검을 준다. 당서란은 고고한척 하는 화수를 타락시키기 위해 미약을 먹이고, 주룡진과 화수는 뜨밤을 보내지만, 화수는 약이 취해 기억하지 못한다. 한편, 화수의 호위모사 해무영은 화수를 구출하기 위해 방법을 강구한다.

전: 주룡진은 그날 밤 이후 화수에게 애정을 보이고, 그런 주룡진을 대하며 화수 역시 변하기 시작하지만 그 실체를 몰라 혼란스러워 한다. 그러던 중 해무영은 비밀통로를 찾아 화수를 탈출시키지만, 곧 주룡진에게 붙잡힌다. 주룡진은 부상 입은 해무영을 인질로 화수의 몸을 탐하고, 성교를 통해 선기와 마기가 교차되면서 두 사람은 황홀경을 느낀다. 주룡진은 화수를 더더욱 아끼지만, 화수는 그 열락을 느낄수록 마음이 공동화 되어 생에 의지를 잃는다.

결: 한편, 무림맹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주룡진이 자리를 비운 틈에 화수와 해무영를 구한다. 이 소식을 들은 주룡진은 천신궁으로 돌아와 화수가 없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마기가 폭팔한 광마가 된다. 이성을 잃은 광마는 무림으로 화수를 찾아오고, 많은 무림인들이 목숨을 잃는다. 마지막 보루인 파마진 마저 실패한 위기의 순간, 화수는 시종을 통해 전해 받은 은월검을 들고 나타난다. 화수는 주룡진을 살리고 싶은 염원으로 화신의 경지에 이르고, 주룡진의 단전을 파훼한다. 화수는 주룡진과 함께 천신궁으로 돌아간다.

point 3 진지충의 Review: '짐승'... 그리고 '무림기연'

유명한 작품은 많고, 그 중 일부 잘 쓴 작품, 또 그 중 일부 오랫동안 기억나는 작품, 그리고 그 안에서 몇몇만이 인생작이 됩니다. 사람의 사귐과 참 비슷하죠? 말이 통하는 사람들, 그 중 일부가 좋은사람, 또 그 중에 일부 진국, 그 안에서 소수만이 내 인생의 동행자가 되는 것 처럼요. 만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작품들... 그 인생작 중 한 작품은 분명 이순정님의 '짐승'입니다.

신작 '무림기연'을 읽으면서 '짐승'이 떠오른 이유는 본능적 공과 사회적 수의 조합이나 공이 쉽게 인정하는 애정을 어렵게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수의 도덕관이 유사하기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짐승'과 같은 3권의 분량이었음에도 무협물이라 풀어야 할 시대배경과 관계설정이 많아서 였을까요? 이순정님의 강점인 입체적 인물들이 섭섭 할 정도로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고, 회수못한 떡밥은 없었지만 허무한 떡밥은 많았습니다. 그 분량 내에선 최선이었겠지만, 애당초 3권의 분량이 너무 적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이순정님의 입체적 인물묘사를 정말 좋아합니다. 선악과 시비를 나눌 수 없는, 복합적이고 복층적인 인물을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재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서란'이나 '백효조', '장태주'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그저 소비되어 버린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누구보다 정파의 자부심이 강했기 때문에, 더 많이 엇나가고 망가져야만 살아 질 수 있었던 당서란의 '집착'이나, 생명이나 평온한 미래보다 더 갈구했던 백효소의 '소속감', 차가운 바위여야 했지만 실은 지하를 잠잠히 흐르던 마그마 같던 장태주의 '애정'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이 쓰입니다. 천금궁이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 감금된채 죽어가는 이들을 보며 생존해야만 했던 너무나 다른 인물들의 이면들이 묻힌 것 같아서요.

한편, 공수의 캐릭터는 매우 선명합니다. 주룡진 예쁘고 강한 것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것은 마땅히 가져야하고, 가지는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곁에 두고, 좋은 것을 주고, 도망가면 잡아옵니다. 마치, '짐승'의 사내가 생각이 나죠. 반면, 이화수의 삶은 아버지 이화영의 그림자였어요. 이화영은 화산파 비원인 매령환무검을 통달하지 못해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내고 우수한 무재를 낳기 위해 애정 없는 결혼을 해요. 그렇게 태어난 이하수의 존재 가치는 오로지 매령환무검뿐이었죠. 화수는 세상과 단절 된 채 갇혀, 폭행에 가까운 채벌을 받으며 무술을 연마하고, 매령환무검을 익히지 못한 화수가 이루낸 모든 것들은 인정 받지 못합니다. 가문이 유일한 척도였던 지언처럼, 삶의 선택할 자유는 박탈되요. 정확히는 가져 본 적조차 없죠.

하지만, 주룡진은 사내와 달리 노련한 수장이었고 이화수 역시 도련님 특유의 솔찍하고 제멋대로인 일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룡진은 사내와 달리 화수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꾀어 낼 수 있었고, 화수는 지언처럼 극도로 피폐한 선택을 하기 전에 주룡진에 대한 애정을 인정합니다. 좀 순해진 '짐승'과 부러지지 않고 휘어진 '선비'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야기가 너무 무겁지 않게 깊이를 조절하는 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짐승'을 읽고 폭팔 할 듯 샘솟던 사념이 '무림기연'에서 너무도 잔잔한 것이, 저로서는 지난 작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지네요.

주룡진은 옥루정에 갇혀 파천신공을 익힙니다. 마치, 화산에 갇혀 매령환무검을 익혀야 했던 화수처럼요. 단지, 주룡진은 화수와 달리 성공하여 옥루정을 나오죠. 하지만, 절정고수의 무공임에도 파천신공을 익힌자가 없는 이유는 마기를 잡기 어렵고, 마기을 잡지 못해 주화입마에 들면, 광마 혹은 광신이 되어 인간성을 잃고 살인귀가 되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강제로 익혀야 했던 무공의 부작용에 시달리던 주룡진에게, 그 무공으로 얻은 권력을 누리는 것 역시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양기를 채우기 위해, 정파 제자와 자제들을 납치해와 겁탈하고 죽이면서도 주룡진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요.

주룡진은 죽은자들을 대신 할 자들이 계속 납치하고, 공력이 높아 기력이 빨리고도 살아 남은 자들은 기어코 살려내요. 치욕스러운 겁간에 몇번이고 도망치고 자진하지만 다시 운우정에서 눈을 떠야만 했던 위세높은 공자들은, 서서히 살기 위해 스스로 주룡진에게 길들여지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러다 화수가 나타나죠. 성교가 아닌 방식으로, 여러명이 간신이 잠재울 수 있었던 마기를 홀로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 화수는 주룡진에게 가장 귀한 사람으로 대접을 받습니다. 망가지지 않은채, 이제는 자신들이 말할 수 없는 고고한 사변(思辨)을 내뱉으며, 천금궁에서 호위호식하는 자... 화수의 등장은 운우정에 숨죽여 살던 많은 이들을 흔들어 버리죠.

심지어 주룡진 조차도 말이예요. 주룡진은 들끓던 마기가 화수의 선기에 의해 잠잠해지자, 그간 느끼지 못했던 인간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상처받고, 삐지고, 보고싶고, 주고싶은... 만약 언젠가 죽게 된다면 꼭 너였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화산에 갇혀, 친우 한명과 호위 한명이 인간관계의 전부였던 화수 역시 그런 주룡진의 변화에 함께 울렁거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 감정들은 화수의 정파 후계자로서 쌓아 왔던 도덕관이라는 허들을 넘지 못합니다. 미약을 먹고 주룡진과 잠을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해무영을 살리기 위해 주룡진과 한 침대를 쓰기 시작하면서 화수는 텅빈 인형이 되어버리죠.

'무림기연'은 분명 BL장르에서 보기 힘든 제대로 된 무협물입니다. 그럼에도 분량의 한계인지, 주요전개가 너무 후다닥 진행 된 느낌이 있습니다. 화수가 주룡진이 준 영물을 잘 받아 먹고, 영기가 가득찬 천금궁에서 수련을 게을리지 하지도 않았으니, 매령환무검을 통달 한 것이야 그럴 수 있다치지만, 화신등장은... 사랑은 무한의 위대함이라고 이해해야할까요. 어쨌든 극적 반전을 위해서라지만, 화산파 후계자 한명을 살리고자 무림맹이 거의 전멸하고, 광마가 된 주룡진을 살리기 위해 화신의 경지에 도달한 화수는, 주룡진의 단전을 파훼하고 그를 데리고 천금궁에 돌아갑니다.

무림을 떨게 한 광마도 사라졌고, 이제 그가 더 이상 정파의 젊은이를 납치 할 일도 없어졌죠. 이화영은 후계자를 잃었지만, 평생 염원했던 매령환무겸과 화신을 보게 되고, 화수는 자유와 사랑을 찾습니다. 해피엔딩이죠. 그런데 왜 이리 찜찜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주인공만 좋으면 장땡인 할리우드 영화 엔딩 크레딧을 보는 기분이랄까요.

결론은, '역시 이순정! 하지만 아쉽다.' 입니다.

Posted by 진지한Bgarden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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